2020. 9. 25. 15:19

기본소득, 혁신의 시드머니

기본소득은 어느 정도의 소득이어야 하는가? 각 사회가 동원 가능한 재원이나 사회적 이익 등을 고려할 때, 즉 사회적 생산력 수준을 고려할 때 기본소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다른 일을 해야 할 정도의 금액이 다수의 공감을 얻고 있다. 일에 대한 유연한 사고를 유도하면서 일자리를 선택할 자유도 증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은 기본소득을 받음으로써 임금이 높을 뿐 아니라 가장 만족스러운 일을 선택할 수 있다. (높은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주 20시간의 일자리와 자원봉사 활동 15시간의 조합 등). 선택 옵션이 늘어나면 행복도가 증가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거나 사회에 공헌할 기회가 증가한다.

그렇지만 기본소득이나 사회배당금을 도입하는데 몇 가지 장애물이 존재한다. 첫째는 도입을 둘러싼 세대 간 인식의 격차 문제이다. 예를 들어, 일본이나 한국 사회에서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인식이 강하고, 그로 인해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 해야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는데, 이것은 사람들이 산업사회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된 결과이다.

산업사회 이데올로기가 내면화된 기성세대는 일자리를 찾아 돈을 벌어오지 않으면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평생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할 수 있는 일자리를 제공하는 사회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기술 발전과 혁신으로 생산 과정에 필요한 인간 노동의 양이 점점 더 적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기술적으로 로봇이 사람 대신 여러 분야에서 활약하며 농업이나 제조업, 서비스업 갈은 일을 대체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노동의 역할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직면한다. 이에 대한 해법은 노동시간을 축소하고 일자리를 공유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기본소득을 받은 개개인은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이를 통해 개인의 행복과 사회 이익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가능하다. 더 큰 자유(시간)를 갖게 되면 사람들은 자기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는데 더 많은 시간을 쓰게 된다. 그 결과 개인은 행복을 추구할 수 있게 되고 사회 혁신 활동이 활발해질 것이다.

일부 미래학자들(제레미 리프킨 등)은 노동시간이 크게 축소될 수밖에 없고, 그 결과 일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머지않아 주 3일 근무가 정착될 것으로 전망한다. 최근 30년 동안 선진국을 중심으로 우울증이나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극도의 스트레스로 인하여 정신적, 육체적으로 기력이 소진되어 무기력해지는) `번아웃 증후군` 환자가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다.

WHO는 2030년에 우울증 질병 순위에서 1위가 될 것으로 전망한다. 지난 200년 동안 눈부신 진보를 이뤄왔는데 갑자기 많은 사람이 우울증을 앓고 불안해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2012년에 <부채. 그 첫 5,000년>의 저자 데이비드 그레이버 David Graeber는 그 이유 중 하나로 만연한 `헛된 일 Bullshit Jobs`, 즉 `불시트 잡스`를 지적한다. `불시트 잡스`에 종사하는 사람은 일을 하지 않고도 돈을 많이 받지만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끼듯이, 사람은 누구라도 기회가 있으면 자신의 인생에서 무언가 다른 사람의 도움이 되고 싶어한다.

영국의 시장조사 및 데이터 분석회사 유고브 YouGov의 "당신의 일은 사회에 의미있는 공헌을 하는가?" 라는 질문에 영국의 직장인 중 37%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는데 이 부분에 의미를 둔다는 걸 반증한다. 실제로 주요국들에서는 노동시간이 줄어들면서 늘어난 여가시간에 사람들이 학습과 돌봄, 사회참여를 통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가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두 번째 장애물은 기본소득 도입을 반대하는 사람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논리로, 일에 대한 동기가 저하된다는 주장이다. 공짜로 돈을 나눠주면 사람들이 게을러지거나 심지어 사람들이 모두 일을 그만둘 수 있다고 본다. 인간은 자유로운 시간이 늘어나면 TV만 보며 해이해질 거라는 우려이다.

그러나 TV 시청 시간이 긴 곳은 미국, 터키, 일본처럼 노동시간이 긴 나라들이다. 정말로 피곤한 상태에서 여유로운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TV를 시청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노동시간이 짧은 나라일수록 자원봉사 활동에 참여해 어린아이나 고령자를 돌보거나 작곡이나 예술 분야에서 활약하는 사람이 많다.

게다가 인간은 빈곤선을 넘어서면 돈을 효율적으로 활용한다. 자기 인생에서 무엇을 얻고 싶은지 스스로 결정할 자유가 있으면 돈을 낭비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이처럼 두 가지 장애물은 `노력에 대해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20세기 가치관`과 `21세기 가치창출 방식`의 충돌에서 비롯된다.

일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즉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인식은 노동시간과 가치창출 간 비례관계나 가치창출에서 노동과 여가의 역할 구분 등 산업사회의 경험에서 비롯한다. 그런데 21세기는 일률적이고 사무적인 결정은 컴퓨터가 수행하고, 창의성이 미래에 가장 중요한 기술로 부상한 시대이다.

`4차 산업혁명` 이후의 사람들은 일에 대한 인생의 의미를 규정하고 사회에 무언가 가치를 창출하는 일을 하고 싶어한다. 즉 사회에 창의성이 넘치려면 더 많은 자유가 확보디어야 하는데, 여기서 기본소득이나 사회배당금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처럼 기술 진보와 기본적인 사회보장이 만날 때 우리는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늘릴 수 있고 사회적으로 가치있는 일을 할 수 있으며, 동시에 더 잘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할 수 있다.

- `호모 엠파티쿠스가 온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