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0. 19. 11:56

안중근 의사 재판 부당성, 일제도 알고 있었다.

신운용 연구원, 이토 히로부미 등 전문기록 발견
"재러한인에 日재판권 없어"…"한국과 협의 필요성 인정"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을 앞두고 일제가 하얼빈 의거와 같이 조선인에 의해 외국에서 발생한 사건에 재판권을 행사한 것은 국제법상 하자가 있다는 점을 스스로 인정한 사료가 발견됐다. 더욱이 그런 판단을 내린 당시 일제 수뇌부가 결정 몇 년 뒤 안 의사의 손에 절명한 이토 히로부미 본인이었던 것으로 드러나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신운용 책임연구원은 안 의사 의거 2년 전인 1907년 하얼빈에서 한국인 김재동 등이 일본인을 살해한 사건에 관한 기록을 최근 일본의 외교사료관에서 발견해 18일 공개했다. 자료는 일본 정부가 재판을 준비하는 과정과 이후 재외 한인에 대한 재판권 문제를 검토한 내용 등이 포함돼 있다. 김재동 사건 직후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였던 카와카미 도시히코는 러시아가 그의 신병을 넘겨주려 하지 않자 고무라 주타로 외상에게 전문을 보낸다.

카와카미는 "(일본이) 한국인에 대해 재판권을 갖지 않는다고 하면 인도받지 않는 것이 지당하다고 사료되나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 훈령을 청한다"고 문의했다. 그러자 고무라 외상은 카와카미에게 "한국인들의 신병을 인도받으라"는 훈령을 내렸고, 일본 정부는 결국 이들을 넘겨받아 직접 재판해 사형 등을 선고했다. 이후 일본 정부는 재외 한인으로 인해 발생한 사건의 재판권을 어떻게 행사할 것인지를 논의했는데, 이듬해 이토 히로부미가 이 사건과 관련해 하야시 다다스 외상에게 보낸 전문이 주목된다.

이토는 전문에서 "재외 한인 재판사무에 대해 한국 정부와 협의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인정한다"며 "그러나 이 경우 법률 관제(제정) 등이 필요할 뿐 아니라 실행상 지장이 적지 않으므로 협의할 필요가 없다"고 밝혔다. 이토 역시 하얼빈에서 조선인에 의해 일어난 사건을 일본이 직접 재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신 연구원은 "당시 국제법에 따르면 사건이 발생한 러시아에서 재판을 주관해야 하고 일본에 신병을 인도하려면 한국과 협의를 거쳐야 했다. 하지만 사료에서 보듯 일본은 `편의상' 재외 한인에 대한 사법권을 불법적으로 가져갔고 그 부당성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특히 일제가 이후 안 의사의 재판권을 러시아로부터 가져오는데 이 사건을 `선례'로 삼았다는 점도 드러났다.



의거 후 구라치 데츠기치 정무국장은 이시이 기쿠지로 외무차관에게 안 의사 신병 처리를 문의하며 `선년 재청(지난해 청나라에 있는) 영사에게 발한 훈령을 참조해 의견을 지급 바란다'고 전보를 보냈는데, 해당 훈령은 김재동 사건에서 고무라 외상이 보냈던 것이기 때문이다. 신 연구원은 "일본 스스로도 국제법에 어긋난다고 인정한 김재동 사건이라는 선례가 하얼빈 의거 후 안 의사의 재판권을 일본이 가져오는데 중요한 근거로 작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일본이 안 의사를 일본 법정에서 재판한 것이 정당한 것이었느냐에 관한 한일 역사학계의 논란이 새 국면을 맞을 전망이다. 서울시립대 정재정 교수는 "일본 측은 러시아가 안 의사의 신병을 스스로 넘겨줬기 때문에 일본 법정 재판은 당연한 조치였다고 주장해 왔다"며 "이번에 발견된 이토 히로부미의 전문 내용 등은 일본 학자들 논리의 한계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어 "안중근 재판이 러ㆍ일간 정치논리로 이뤄졌다는 것이 지금까지 정설이었다면, 이번 논문은 일본의 치밀한 공작의 산물이라는 측면을 새로 조명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평했다.

연합뉴스 / 임형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