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다와 카르마(Karma)
베다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삶은 의식이다. 즉, 삶은 미묘하거나 오컬트적인 결과를 낳는 반복된 행위로 되어있다. 미래의 조건은 물론이려니와 우리가 살고있는 현 상태는 이 반복의 결과이다. 각각의 행위는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가 무엇이 될 것인지를 결정짓는데 어떤 영향을 미친다. 의도를 가지고 늘 하는 행위, 그리고 매일의 행위가 영혼의 진화 방향을 결정짓는 영향력의 크기이다.
돈을 벌든지 진리를 추구하든지 그러한 행위는 우리의 숭배 혹은 삶의 에너지를 향하게 하는 방향이다. 그리고 그 행위는 반드시 결과를 가져온다. 카르마와 재탄생에 관한 이 신비스러운 교리가 우파니샤드에서는 이성적이면서 철학적인 용어로 설명되어 있다. 민감한 사람들은 세상에 보이는 많은 부당함을 보고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
대부분의 경우 악한 사람들이 선한 사람들을 이기는 것처럼 보인다. 선한 사람이 가난과 사회의 거부로 고통을 받는 반면에, 약한 사람이나 선과 악이 혼합된 사람들이 돈과 명예와 권력을 누리는 것을 종종 본다. 성자들, 현자들, 화신들을 때로 무시되고, 중상모략을 당하고, 순교를 당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삶 속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그들 내면의 자질과 좀처럼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진실로 지도자의 자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지도자의 자리에 있는 것을 보기가 어렵다. 진정한 지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교육 기관의 책임자로 있는 것을 찾기 어렵다. 영적 체험이 부족한 사람들이 종교 지도자들이 되고 있다.
악한 자가 선한 자에 의하여 패배하는 경우를 보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예외적인 일로 본다. 약한 자와 가난한 자가 빈번히 짓밟히는 불평등이 만연해 있는 세상을 본다. 오늘날 많은 동식물과 더불어 이 지구 자체가 파괴되고 있다. 신이 있다고 해도 신은 이러한 세상을 방관하고 있으며 또 이 세상의 진화 과정에 관여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반적인 이해에 의하면, 카르마의 가르침은 "뿌린대로 거둘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을 전제로 하여 많은 사람들은 삶에서 부유하고 풍족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과거에 행한 선한 행위의 보상으로 부를 거두고 있으며, 현재 빈곤하고 열악한 환경에 처한 사람들은 이전에 자신이 행한 악행을 되돌려 받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
카르마에 대한 이러한 태도들은 단순한 생각이며 또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카르마는 세상의 외적 이름과 형태가 아니라, 사물의 내적 실재에 기초를 두고있기 때문이다. 영적 법칙으로써의 카르마는 성공과 실패에 대한 여러 문화적 정의에 맞지 않는다. 생명과 의식은 빙산과 같은 것으로, 빙산의 큰 부분은 보이지 않고 있다.
사물의 보이는 부분만을보고 판단할때, 실재에 대하여 많은 잘못된 결론을 내리고 될 것이다. 영적인 법칙으로써의 카르마는 인간의 표면적 마음과 감정의 선입견이나 편견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전체 실재에 적용해야 한다. 내적 관점으로 본다면, 영혼의 행복은 종종 자아의 고통이요, 자아의 행복은 종종 연혼의 고통이다.
이렇게 볼때 삶에 있어서 행운은 강한 자아의 표시일 수도 있으며, 반면에 고통은 사물의 외적인 형태 이면에 있는 진리를 일깨우기 위해 우리에게 올 수도 있다. 보다 진화된 영혼들은 보다 힘든 화신들을 선택하는 반면에, 그렇제 않은 영혼들은 편안과 안일을 추구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산을 오르는 등반가에 비유할 수 있다. 초보 등반가는 쉬운 비탈만을 택하는 반면에, 경험이 많은 등반가는 어려운 비탈을 택할 것이다.
우리는 또한 영적인 삶을 선택하는 사람이 사회의 외적 질서에 어긋나는 삶을 추구하는 것을 본다. 그래서 영적인 구도자가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고대 신화에 의하며, 모든 신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도록 우리를 그냥 내버려둔다고 한다. 우리 자신만이 무지를 상징하는 용을 파괴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삶에서 받는 압박과 고난을 반드시 나쁜 카르마의 징표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대단한 은총일 수 있다. 영적인 삶에서 보면, 나쁜 카르마는 카르마의 속도를 빠르게 진행시켜 카르마를 소멸시키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영적인 길을 갈때 부정적인 카르마를 더 많이 경험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부정적인 카르마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악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정화 과정의 한 부분일 수 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선과 악이라는 모든 카르마를 넘어서야 한다. 우리의 실재를 우리 자신의 진정한 참나에 두어야지, 행위의 결과에 두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결국에는 모든 행위의 결과들을 포기해야 한다. 그것 속에서만 자유와 초월이 있다. 최상의 선은 동기가 없으며 결과를 추구하지 않는 것이다. 최상의 미덕은 세상의 변화나 우리 자신의 발전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존재하고 있는 평화와 조화를 이루며 휴식하는 것이다.
- 베다 입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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