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희대표, 퇴원하여 처음 글을 쓰다.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 대의민주주의의 실패
이명박 정부가 집권하고 한나라당이 절대 다수 의석을 차지한 이래, 국회는 3년 동안 단 한 차례도 거르지 않고 충돌에 휩싸였다. 2010년 12월 1박 2일 동안 벌어진 4대강 예산 날치기는, 2008년 12월 MB악법 전쟁으로 한 달 동안 농성을 벌였던 때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사태가 되어버렸다.
적어도 정상 진행되던 심의를 일방 중단시키고 강행처리한 일은 없었으며, 예산부수법안 이외에 수면 아래 있던 서울대 법인화법 같은 법안들까지 예산안과 함께 직권 상정으로 처리한 경우는 이전에 없었다.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 집권 아래에서, 대의민주주의는 실패했다. 대의민주주의는 국민이 선출한 대표가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해나간다는 것이다. 매 사안마다 국민의 의사를 집결하기 쉽지 않고 다중의 통제되지 않는 열기는 위험하다고 여긴 근대의 정치이론가들은, 숙고의 능력과 합리성을 갖춘 대표가 국정을 운영해야한다며 대의민주주의를 찬미했고, 대표들이 지역적 계급적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아야한다는 이유로 기속적 위임에 반대하며 대표의 임기를 보장했다.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경멸과 두려움을 바탕에 두고 설계된 대의민주주의제도가 실패하지 않을 수 있는 최소한의 요건은, 헌법의 가치를 체득하고 구현하는 대표들의 존재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아래에서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은, 예산안을 12월 2일까지 처리하라는 원활한 행정업무집행을 위한 절차규정을 목적규범인양 뒤바꿔 민주주의를 무너뜨렸다. 시한내 처리해야한다며, 타협은 고사하고 논의조차 거부했다. 헌법이 끝끝내 수호하고자 하는 것은 민주주의라는 가치이지, 12월 2일이라는 시한이 아니다.
이 시한은 지키면 좋으나 안 지켜도 어쩔 수 없는 훈시규정인 반면,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심의절차는 반드시 지켜야하는 강제규정이다. 정기국회 내에 예산안을 처리했다며 “나는 이것을 정의라고 생각한다”고 한 김무성 한나라당 대표의 말은, 헌법의 가치를 판단할 지적 능력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자백한 것이다. ‘정의’라는 단어가 무지를 드러내는데 쓰인 기이한 용례이다.
한나라당 의원들의 민주주의 이해는, ‘민주주의는 다수결’이라는데 멈춰있다. 2년 8개월이나 지나버린 총선에서 다수의석을 얻었으니 보장된 임기 안에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하는 논리이다.
다수결의 원칙이 민주주의 운영원리가 되는 것은, 대표가 소속 정당과 출신 지역과 계층의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절차에 따른 토론을 통해 국민 전체의 이익을 위해 자유로이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국회의원들이 청와대 지시에 따라 행동하고 다음 공천에 얽매여 자유로운 판단이 불가능한 현실에서, 그들 스스로 자유로운 판단의 여지를 반납한 상황에서, 다수결은 더 이상 민주주의 원리로서 작동하지 않는다.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은 대의민주주의제도를 운영할 능력이 없다. 4대강 사업에 대한 국민 다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산안 강행처리로 돌파하는 것이 다음 총선과 대선에서 정권재창출의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라고 판단하는 한나라당은, 헌법과 선거제도가 어떻게 바뀌든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에 기여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
이 사태를 진두지휘한 이재오 특임장관은 사태가 끝나자마자 “원인은 한국의 정치토양이 부실하고 지력이 다한 데 있다”며 개헌과 선거구제 개편을 다시 들고 나왔다. 그러나 문제는,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에게 대의민주주의제도를 운영할 지적 능력이 애시당초 없었던 데 있다. 책임 떠넘기기에도 정도가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를 되살리고 국회의 충돌사태를 되풀이하지 않을 길은,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을 심판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대통령과 집권여당을 바꾸지 않는 한, 이 실패는 회복될 가능성이 없다.
2010. 12. 10
민주노동당 대표 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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