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2. 26. 20:39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 법정스님

깨달음에 이르는 데에는 오로지 두 길이 있다. 자기 자신을 안으로 살피는 명상과 이웃에게 나누는 자비의 실현이다. 그것은 곧 지혜의 길이요, 헌신의 길이다. 우리가 책을 대할 때는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길 때마다 자신을 읽는 일로 이어져야 하고, 잠든 영혼을 일깨워 보다 값있는 삶으로 눈을 떠야 한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펼쳐보아도 한 글자 없지만 항상 환한 빛을 발하고 있는 그런 책까지도 읽을 수 있다. 책 속에 길이 있다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책 속에서 그 길을 찾으라.

정신적으로 여유있는 자신의 의식세계를 지닌 사람들에게는 설사 외떨어진 섬에서 산다 할지라도 고립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는 자신의 세계가 구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독과 고립은 비슷한 말 같지만 엄밀히 살펴보면 전혀 다른 정신상태다. 고독은 좋은 것이지만 고립은 좋은 것이 못된다.

고독은 때때로 사람의 영혼을 맑힌다. 고독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은 그만큼 무디어 있거나 자신의 삶에 무감각하다. 고립을 말 그대로 이웃과 어울리지 못하고 외톨이로 처진 상태를 가리킨다. 여럿이서 복잡하게 얽혀 살아가는 직장이나 아파트 단지 같은데서, 공간적으로는 이웃과 함께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고립된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고립은 좋지않은 것이다. 그 고립은 소외감을 동반하기 때문에 건전한 정서를 이룰 수 없다.

명상은 깨어있는 존재의 꽃이다. 명상은 어떤 종파의 전유물이 될 수도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명상을 통해 자신을 마음껏 꽃피울 수 있다. 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도 자연의 섭리같지만, 그 안에는 홀로 겪는 명상의 세계가 있어 생명의 신비인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알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조용히 안팎으로 지켜보라. 지켜보는 이 일이 곧 명상이다.

명상의 스승은 말한다. "홀로 명상하라. 모든 것을 일단 놓아바려라. 이미 있었는지를 기억하려 들지 말라. 굳이 기억하려 한다면 그것은 이미 죽어있는 것이 되리라. 그리고 기억에 매달리면 다시는 홀로일 수 없으리라. 그러므로 저 끝없는 고독, 저 사랑의 아름다움 속에서 그토록 순결하고 그토록 새롭게 명상하라. 그러면 시들지 않는 천복이 있으리라."

우리는 바깥일에만 팔려 자기 자신을 안으로 들여다볼 줄을 모른다. 우리 시대는 나라 안팎을 가릴 것 없이 온통 경제 타령만 하면서 사람의 일을 소홀히 하고 있다. 사람으로서 삶의 최고 가치를 어디에 두고 살 것인가는 저마다 처지와 소망이 다르기 때문에 한결같을 수 없다. 하지만 어디에서 어떤 형태로 살건 간에 스스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은 삶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전문가들의 체험에 의하면, 어둠과 밝음이 교차되는 이런 시간이 하루 24시간 중에서도 명상하기에 가장 알맞은 때라고 한다. 명상이란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과 다른 무엇이 아니라 깨어있는 삶의 한 부분이다. 묵묵히 쓸고 닦는 그 일이, 시장에서 무심히 사고파는 그 행위가, 또한 맑은 정신으로 차분하게 차를 모는 그 운전이 바로 명상으로 이어진다.

어떤 직종에서 무슨 일에 종사하건 간에 자신이 하는 일을 낱낱이 지켜보고 자신의 역할을 자각하는 것이 곧 명상이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싶으면 자기 자신을 안팎으로 냉철하게 살펴보면 된다.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고, 무슨 일을 좋아하며, 이웃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고, 무엇을 삶의 최고 가지로 삼고 있는지, 곰곰히 헤아려보면 자기 존재의 실상을 엿볼 수 있다.

자기 자신을 살피는 이런 명상의 시간을 갖지 않으면, 자신의 삶을 자주적으로 이끌지 못하고 바깥 소용돌이에 자칫 휘말리게 마련이다. 자신을 안으로 살피는 일이 없으면 우리 마음은 날이 갈수록 사막이 되고 황무지가 되어간다.

한 생애를 유장한 흐름으로 본다면 매사에 너무 조급하거나 성급하게 서둘지 말아야 한다. 개인의 생활이나 한 나라의 경영에서도 이 조급함과 성급함은 금물이다. 그 많은 시행착오는 바로 이 조급함과 성급함이 낳은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우주의 숨결같은 그 조화에 마음을 기울인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순간순간 삶의 묘미를 터득하게 될 것이다.

문명에는 독성이 들어있다. 문명은 점진적으로 사람을 시들게 만든다. 그러나 자연은 원초적인 것이고 건강한 것이며 인간의 궁극적인 의지처이다. 인간의 머리와 손으로 만들어낸 문명이지만, 거기에 너무 의존하게 되면 그 문명으로부터 배반을 당할 때가 반드시 온다. 문명은 온전하지 못한 인간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분수 밖의 욕구인 탐욕은 목마른 허욕일 뿐 근원적으로 내 것이 될 수는 없다. 본래 내 것이란 없는 법이니까. 어떤 개인의 소유라 할지라도 크게 보면 이 우주의 선물이다. 선물이란 감사히 받아 값있게 쓸때 빛이 나고 묵혀두면 썩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소유란 그 사람이 한때 맡아가지고 관리하고 있는 것. 따라서 그 기간이 연장된다.

꽃들은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 않는다. 저마다 자기 특성을 지니고 그때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피어나며 다른 꽃과 비교하지 않는다. 남과 비교할때 자칫 열등감과 시기심 또는 우월감이 생긴다. 견주지 않고 자신의 특성대로 제 모습을 지닐때 그 꽃은 순수하게 존재할 수 있다.

그런데 유달리 우리 인간들만이 타인을 의식하고 타인과 비교하려고 든다. 가진 것을 비교하고 지위를 비교하고 학벌을 비교하고 출신교를 비교한다. 이런 결과는 무엇을 낳는가. 시기심과 열등감, 그래서 자기 분수 밖의 것을 차지하려고 무리한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오늘날 학교 교육은 개인이 지닌 특성을 무시하고 사람의 값을 점수로만 매기고 따지려는 어리석음을 자행하고 있다. 그래서 동료간의 우애와 이해와 협력 대신 시기심과 경쟁력과 좌절감을 안겨준다. 그가 어떤 특성과 기능과 인성을 지난 어떤 사람인가는 묻지 않고, 대학을 나왔느냐 안 나왔느냐, 또 어떤 대학을 나왔느냐로 그의 인격을 평가하려고 한다.

이 땅에서는 대학을 학문의 전당으로 여기지 않고 마치 결혼을 위한 수단과 사회생활의 발판쯤으로 격하시키고 있는 상황에다. 이런 부조리하고 비인간적인 사회의 흐름때문에 그 대학이 어떤 자질을 지닌 사람들에 의해 어떻게 운영되며 무슨 짓을 하는 곳인지 물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온갖 수단 방법을 통해 거의 결사적으로 매달린 결과가 작금에 드러난 이 땅의 대학과 교육계의 한 단면이다. 현재까지 알게 모르게 이어져 내려온 그릇된 사회적인 통념과 가치의식의 일대 전환, 그리고 교육에 대한 근본적인 개선없이 들추어내고 잡아들이는 일만으로는 새로운 시대를 이루기가 어려울 것이다.

삶은 개인이나 사회나 인과관계로 엮인 하나의 고리다. 누가 들어서 그렇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과 우리들 각자가 뿌리고 가꾸면서 거둔다. 또 사람은 저마다 그릇이 다르고 삶의 몫이 있기 때문에, 남의 그릇을 넘겨다볼 필요도 없이 각자 자기 삶의 몫을 챙기면 된다.

그릇이 차면 넘치고, 남의 몫을 가로채면 자기 몫마저 잃고 마는 것이 우주의 질서요 신의 섭리임을 어리석지 않은 사람은 알아차려야 한다. 세상에는 공것도 거저되는 일도 절대로 없다. 눈앞의 이해관계만 가지고 따지면 공것과 횡재가 있는 것 같지만, 시작도 끝도 없이 흐르는 인과관계의 고리를 보면 내가 지어서 내가 받는다. 횡재를 만나면 횡액을 당하기 일쑤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이와같이 총체적인 부정부패로 전락하게된 것도(물론 가진 사람들의 경우다) 따지고 보면 구조적인 모순으로 돌리기에 앞서, 개개인이 하루 한때라도 자신의 삶을 안으로 살펴보는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지 못한데에 그 요인이 있지않을까 싶다.

저마다 자기 삶의 몫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위해 자신이 살고 있는지를 한때라도 생각을 가다듬고 살필 수 있었다면 우리 사회는 지금보다 훨씬 건강해졌을 것이다. 우리는 예전에 물질적으로 너무 가난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밥술이나 먹고살게된 오늘에 와서까지 물질 지향적인 성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역대 정권에서는 국민총생산량에만 관심을 기울였지 국민의 총 행복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상태였다. 그러나 요즘 정신세계의 흐름을 보면 물질 지향적인데서 벗어나 삶의 질을 문제삼는 영적인 변혁의 시기로 접어들고 있다.

우리가 같은 생물계에 속해 있으면서도 일반 동물들과는 달리 인간일 수 있는 것은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노사간의 갈등이 쉬지않고 이어지는 것도 피차가 노동의 대가인 임금만을 문제삼고 노동 그 자체의 가치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고 있지않은데 까닭이 있을 것이다.

노동자들의 복지에 관심을 가진 기업이라면, 그들에게 지불되는 보수나 휴가에 못지않게 그들이 하고있는 일 자체를 중요시해야 한다. 그 많은 산업재해는 인간을 한낱 도구로 여긴 결과 아니겠는가. 마하트마 간디의 말처럼, 노동의 목적은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기보다 인간은 만들어내는 것이어야 한다.

사람은 어떤 것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형성해간다.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서 인간의 형상이 물건에 새겨지기 때문에 노동은 인간의 자기 표현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불량제품은 그 만들어낸 사람의 삶이 불성실하다는 표현이다. 자신이 만드는 물건을 사용할 사람들의 편의와 처지를 염두에 두고 일을 한다면, 그 제품을 통해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인간적인 유대가 형성된다. 따라서 그는 단순한 임금 노동자가 아니라 자기를 실현하는 구도자일 수도 있다.


설렁설렁 불어오는 가을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사는 일이 조금은 적막하고 허허롭게 여겨질 때가 있다. 인간은 누구나 그 마음의 밑바닥에서는 고독한 존재다. 이런 인생의 실상을 받아들이면서 그 안에서 자기 나름의 정신 공간을 찾는 일이 삶의 지혜가 될 것이다.

자기 자신 앞에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만이 비록 가진 것은 없더라도 자신의 삶을 당당하게 꾸려갈 수 있다. 권력이나 지위를 이용해서 모은 재산 때문에 물러나는 공직자들은 미련없이 그 재산을 사회에 되돌려주는 것이, 소유의 집착과 그 멍에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한다면, 세상 물정을 모르는 순진한 소리일까. 누에가 자신이 뽑아낸 고치에 갇히듯이, 자기 자신의 끌어모은 획득물 속에 갇혀 남의 눈치나 보면서 살아간다면 마음편할 날이 없을 것이다.

행복의 비결은 우선 자기 자신으로부터 불필요한 것을 제거하는 일에 있다. 사람이 마음 편히 살기위해서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필요하지 않은지 크게 나누어 생각할 줄 알아야한다.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려면 자기를 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려면 자기를 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을 멍들게 하는 분수 밖의 소유욕에 사로잡히게 되면, 그 소유의 좁은 골방에 갇혀 드넓은 정신세계를 보지 못한다.

있어도 걱정, 없어도 걱정이라더니 요즘 새삼스레 떠오르는 말이다. 그러나 자신의 분수를 알고 투철한 자기 질서를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일 것이다. 어쨌든 가진 것이 많으면 걱정 근심도 많게 마련이다. 적게 가질수록 더욱 사랑할 수 있다. 넘치는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 적게 가지면 걱정 근심도 적다. 가난한 이웃이 많은 우리 처지에서 적게 가지고 어디에도 꿀릴 것 없이 홀가분하게 살자. 이 또한 풍진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지혜다.

외국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니는 몇몇 교민의 자제들을 만나 이야기하면서, 우리 교육이 얼마나 인간을 괴롭히는 잘못된 교육인지를 실감합니다. 우리 학생들은 입시지옥에 잔뜩 주눅이 들어 청소년으로서 지녀야 할 정상적인 정서를 지닐 수가 없습니다.

늘 무엇에 짓눌리고 쫓기는 초조하고 불안한 얼굴들입니다. 성장 과정부터가 이러니 그들이 성인이 되었을때 한국인의 인성과 인격에 적잖은 문제가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이곳 학생들 얼굴에는 그런 그늘이 전혀없이 젊음으로 활달하고 생기에 넘쳐 있습니다. 공부나 연구를 해도 혼자가 아니라 친구와 함께 할 수 있는 공동 과제를 준다고 합니다.

우리 교육은 앞을 다투어 수석을 차지하도록 부추기는 교육, 경쟁심만 잔뜩 조장하는 그런 비인간적인 교육이 아닙니까. 서로 도와가면서 함께 협력하는 교육환경 아래서 자란 사람들과 국제사회에서 그 역량을 겨룰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뻔한 일입니다. 우리가 신 한국을 창조하려면 하루바삐 비안간적인 교육에서 탈피, 인간을 위한 교육으로 그 제도가 크게 혁신되어야 합니다.

꿀벌은 이 꽃에서 저 꽃으로 날아다니면서 어느 꽃에도 해를 입히지 않고 조금씩 꿀을 모은다. 그러나 사람들은 땅에서 무엇을 얻어내려고 할때, 계속해서 빼앗기만 하여 그것이 소진되고 고갈되어 자원이 끝장날 때까지 간다. 우리는 꿀벌한테서 조금만 얻어오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

꿀벌은 자연으로부터 얻은 것만큼 달고 양분이 많은 꿀로 변화시킨다. 그러나 사람들은 산업과 과학과 기술의 이름 아래 쓰레기를 한없이 만들어낸다. 조금만 채취하고 그것을 유익한 것으로 변화시키는 꿀벌의 지혜를 오늘 우리들은 본받아 배워야할 것이다. 어머니는 자신의 지혜를 말로만 하지않고 몸소 그것을 보여줌으로써 자식의 눈을 틔워주고 이해를 돕니다.

진정한 교육은 메마른 지식이나 정보의 전달에 있지 않고, 지혜의 개발과 바람직한 동기유발에 있음을 우리는 여기에서도 엿볼 수 있다. 교육이 피교육자에게 창조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될 수 없다면 그것은 참교육이 아니다. 쿠마르는 말한다.

"우리의 학교들, 우리의 대학들, 정부들, 교육부들은 밤낮으로 우리 아이들의 머릿속에 케케묵은, 필요하지도 않은, 오히려 해독을 끼치는 위험한 생각들을 쏟아넣는라고 바쁘게 바쁘게 돌아가면서 한 조각의 사랑도 심어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아이들을 텅빈 물통으로 여기고 온갖 쓰레기와 먼지를 그 속에 쏟아 넣고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스승이 어머니라면 누구보다도 먼저 어머니가 변화되어야 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자식이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서 온전하게 성장할 것인가를, 맹목적인 열기에 더 이상 사로잡히지 말고, 생명의 차원에서 곰곰이 헤아려 보아야 한다. 당신의 아이는 당신의 사랑과 지혜로써 반듯하게 키울 수 있다.

사람은 내적인 것이든 외적인 것이든 모든 사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욕망과 아집에서 벗어났을때 비로소 전 우주와 하나가 될 수 있다. 욕망이나 아집에 사로잡혀 있는한, 자신의 내부와 외부에 가득차 있는 우주의 신비를 감지할 수 없다.

진정한 명예란 단순히 듣기좋은 세상의 평판이 아니라 자기 자신다운 긍지와 자존심을 뜻한 말이다. 자기 자신 앞에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만이 명예로운 인간이 될 수 있다. 수행자들이여, 정치권력 앞에 의젓하고 당당하게 처신하라. 그런 수행자라면 종교적인 기능 또한 제대로 이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수행자를 세상에서는 귀하게 여긴다.

개인이건 집단이건, 원리 원칙을 무시하고 편법과 적당주의로 처신해 온 우리사회, 대충대충 빨리빨리로 밀어붙여 공기를 단축하는 것을 자랑거리로 여겨 온 건설업계의 그릇된 관행, 그리고 공공 장소에서 함부로 침을 빝고, 피우다 만 담배를 서슴없이 내버리며, 쓰레기를 아무데나 내던지고, 차선과 신호를 무시하고 질주하는 등 이런 기본적인 질서가 지켜지지 않은 잘못된 우리 생활습관이 마침내는 다리를 무너지고 하고, 온갖 비리를 낳게하여 우리 사회를 휘청거리게 할 것이다.

선진국에 이르는 문턱은 결코 낮지 않다는 것을 이번 참사를 통해 실감하게 됐다. 국민소득이 좀 불어났다고 해서, 국제 경기에서 메달을 몇개 더 차지했다고 해서 선진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나라 국민들의 자질과 교양과 시민의식과 책임감과 도덕성이, 버젓한 세계 시민의 수준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선진국의 문턱에 들어설 수 있다. 속은 빈 채 밖으로 드러난 현상이나 물질의 더미만으로 어떻게 선진국 대열에 설 수 있겠는가.

진실은 오히려 침묵을 통해서 전달될 수 있다. 그 침묵 속에 모든 해답이 들어있다. 존재의 바탕인 침묵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은 지혜롭다.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날마다 기도를 드리고 있지만 영혼의 침묵속에서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드물다.

그저 듣기 좋은 말로 할 뿐이다. 기독교식의 말, 불교식의 말, 힌두교식의 말, 회교식의 말 등등. 그러나 진실한 기도는 말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원초적인 침묵으로 이루어진다. 말씀이 있기 전에 침묵이 있었다.

사람에게는 몫몫의 그릇이 있기 때문에 넉넉한 자만 지니게 된다면 그 그릇을 채우면서 여유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식들과의 관계를 돈으로 해결하려 하면 언젠가는 그 돈 때문에 갈등을 빚게 될 것입니다.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예절과 덕성을 길러주고, 작은 일에서부터 책임감을 심어주는 일이 긴요합니다.

아이들을 백화점 같은데만 데리고 가지 말고, 작은 풀꽃의 아름다움에 눈길이 가도록, 그래서 자연의 신비에 마음이 열리도록 이끄는 것도 어머니들의 할 일입니다. 우리는 흔히 얻는 것을 좋아하고 잃는 것을 싫어하지만, 얻어서 해가 되는 일도 있고 잃어서 득이 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당장의 얻고 잃음에 너무 집착하지 마십시오. 때로는 잃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는 것도 있지 않습니까. 문제는 어떤 상황 아래서건 한 인간으로서, 대지의 어머니로서 자신의 영혼과 함께 성숙해지는 일입니다.

균형과 조화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활기요 지혜다. 생태계는 이 균형과 조화로 유지 존속된다. 그런데 이를 무시하고 그저 많은 것을 차지하고 큰 것만을 원하는 우리들의 삶은 날로 병들어갈 수밖에 없다. 균형과 조화로 이루어진 자정능력이 자연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끼리 모여사는 사회에도 자정능력을 있다. 그것은 건전한 가치의식과 도덕성일 것이다.

가치의식과 도덕성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건전한 사회는 자체의 모순을 그때그때 치유하면서 정화한다. 세계화를 외쳐대고 있는 우리 사회는 과연 이런 자정능력을 지니고 있는가. 유한한 인간이 어떻게 무한한 경쟁만을 치르면서 살아갈 수 있겠는가. 인간의 가치는 비정한 경쟁을 통하기보다도 상호 협력으로 구현될 수 있다.

일류가 아니면 살아남지 못한다고? 이류 삼류로도 얼마든지 살아남아 왔다. 수많은 사람들과 나라들이 그렇게 살아온 것을 인류 역사가 증거하고 있다. 허구적인 말의 수사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세계화에 앞서 인간화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직장의 동료끼리 혹은 이웃끼리 같은 국민끼리 서로 믿고 의지해 협력하면서 인간답게 사는 인간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터전 위에서 세계화는 실속없는 한낱호에 그치고 말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모든 것을 경제 논리로만 재고 따지려는 경향에 대해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에게는 물질적인 욕구만으로는 채워질 수 없는 다양한 가치의식이 있다. 인간은 도덕적인 존재이고 심미적인 존재이며 또한 종교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이런 인간의 욕구가 균형있고 조화롭게 채워지지 않는 한 삶의 질은 이루어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