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후기> 국가부도의 날과 ’97년 IMF
1997년 태국의 `바트화`가 폭락에 뒤이어 인도네시아의 루피화까지 급락하면서 동남아를 시작으로 경제위기의 도미노가 우리나라에까지 그 여파를 미쳐 이미 96년 하반기부터 경제가 심상치 않다는 말이 공공연한 비밀이자 사실로 나돌았지만 97년 하반기까지 1년여 동안 정부는 이 사실에 대해 잘 몰랐는지 별반 대처를 하지 않고 있었고, 언론에서는 조선일보를 필두로 아시아 4마리 용들 중 하나인 우리의 경제 펀더멘탈이 튼튼하며 OECD에 가입한 세계 경제규모 11번째 나라로 경제에 관한 장밋빛 기사만 연일 내보내며 위기에 대한 걱정이 없다고 떠들었습니다.
9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우리 국민 2/3 이상이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때 가계들의 저축률은 일본마저 제치고 세계에서 제일 높은 수준이었습니다. 그리고 은행 금리가 12%라 적금이나 예금만으로도 재산을 늘리는 게 가능한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월급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자가 높아 금방 부자가 될 것같은 느낌에 그냥 배부르고 행복했던 기억도 나네요. 그래서 큰 맘 먹고 제일 비싼 컴퓨터로 바꿨고, 내친 김에 차도 한 대 뽑을까 생각했었는데. .
97년 11월 말쯤 집에 와 저녁을 먹으면서 TV를 켰더니 `구제금융`을 신청했다는 속보가 나왔는데 경제는 잘 몰라서 자세한 사정과 상황에 대한 이해는 부족했지만 그래도 나라의 재정 형편이 어려워져 돈을 빌리기 위해 손을 벌린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쪽팔리게 일본에다가. 2년 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소식보다는 충격이 덜했지만 그 여파는 비교할 수 없는 후폭풍을 몰고 왔습니다.
우리가 외채를 단기로 빌려와 동남아 신흥국들에게 환리스크를 안고 장기로 헤지없이 고위험 투자를 했으니 채권이 부실화되자 당연히 막대한 손실이 발생하게 되었고, 이런 위험한 투자는 종금사들에게 치명적인 문제가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파생금융 상품과도 연관이 있었는데 그냥 `모` 아니면 `도`라는 식의 시쳇말로 환투기 거래 도박에서 외통수에 걸려 어?!된거죠.
반면, 우리에게 돈을 빌려준 선진국에서는 더 이상 만기 연장을 해주지 않았는데 그러면서 국가 신용등급까지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내부적으로는 어음이라는 여신 거래방식과 부실한 신용, 잘 될거라는 사람들의 막연한 믿음과 기대, 산업의 중복 과잉 투자와 그로 인한 외채 급증, 그리고 너무나도 어이없이 심사와 대출이 진행된 결과 자그마치 그때 5조원이나 물린 한보철강 부도까지. 이런 과정은 영화에서 제대로 보여주며 설명하고 있습니다.
당시 문제를 해결하는데 써볼 수 있는 방안은 여러가지가 있었지만, 모두 쉽지 않은 결정들이었고, 결국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것으로 최종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국민들은 협상의 진행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없었고, 나중에 알려진 내용은 그야말로 국치 수준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습니다.
그것은 구조조정, 노동의 유연화 또는 활성화, 비정규직 도입, 자본시장 개방, 금리 인상, 외국계 금융사 설립 및 적대적 인수합병의 허용 등이었습니다. 작품은 이와 같은 협상이 진행되는 이면의 내막도 잘 조명하고 있습니다.
빵상이 아닌 뱅상
정부와 정치권은 국민저력, 고통분담이라는 수사를 들먹였고, 일각에서는 제 2의 건국을 외치며 분위기를 수습하고자 했으나 위에 나온 용어가 말하는 실제의 뜻을 알게 된 국민들은 그 이전의 평생직장과 평생고용 개념 대신에 쉬운 해고와 낮아지는 임금, 고용불안, 실업증가를 반대했으나 이미 결정된 사항을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이는 IMF를 겪은 나라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현상이었고, 그렇게 이 나라에 신자유주의의 물결과 천민 자본주의가 밀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급박하게 진행된 당시 협상을 비롯한 여러가지 일들과 대선을 통해 정권이 바뀌고 들어선 김대중 국민의 정부가 IMF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당시 국민들 특히 서민들이 겪었던 고통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중소기업들에겐 한 마디로 사형선고였고, 가족 해체로 길거리에 나앉은 서민들과 노숙자들, 그리고 한강 다리를 찾은 사람들과 자살, 야반도주는 부지기수였습니다. 그리고, 영화에서보다 더 처절했습니다.
그때 가장들이 겪었던 가슴을 짓누르는 심적 고통은 영화에서 허준호씨가 잘 보여줍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까 왜 그리 예전 드라마 `엄마의 바다`가 생각나던지. 대기업과 은행 등 금융권을 살리기 위해 국민의 혈세로 공적자금을 무려 160조원이나 투입했지만 나중에 회수된 금액은 70%에 그치는 정도였으니 도덕적 해이, 소위 `모럴 해저드` 또한 심각했습니다.
그렇게 겨우 살아난 대기업과 은행들은 그 이후에 어떤 행보와 모습을 보여줬습니까. 국민들의 희생과 덕분으로 다시 회생해놓고는 사내유보금만 1천조원씩이나 쌓아두고 재투자나 고용은 나몰라라이고, 은행권도 수수료 장사에 약탈적 대출을 이어간 현재 가계부채는 지난 10년 간 자그마치 1,500조를 넘어섰습니다. 아마 이보다 더 될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다 서민 업종인 골목상권마저 침해하면서 갑질까지 해대고 있습니다.
영화도 끝에 이 가계부채를 걱정하면서 끝납니다. 앞으로 만약 이 부채 폭탄이 터져 가계가 도산하고 국민들이 어려움을 겪을때 기업과 은행들이 예전에 국민들이 나서서 금 모으고, 외채를 갚기 위해 헌신했던 것처럼 도움을 줄까요. 그럴리가요. 갑질을 제도로 정착할 좋은 기회를 그들이 마다할 리가 없을 겁니다.
어떡해서든 국가의 위기를 헤쳐나가 보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김혜수씨의 연기는 그야말로 박수를 보내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그리고, 조우진씨는 어찌 그리 얄밉게 보일 수가 있는지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생각이 불쑥불쑥~. 실제 모델이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썩을. . 자리를 이용해 경제 위기를 발판삼아 IMF와 국제 금융자본에 나라를 넘겨주고, 자신들은 개인의 영달과 이익을 챙긴 협잡꾼들.
그런데, 실제로 당시 책임적인 위치에 있었던 고위 관료들은 IMF로 가지 않기 위해 막판까지 일본에서 돈을 빌리려는 시도를 했다고 합니다. 이걸 미국의 빌 클린턴 행정부가 일본에 압력을 가해 무산시킨 사실이 뒤에 밝혀졌다니 클린턴이나 오바마나 민주당이나 다 겉다르고 속다르긴 마찬가지. 모두 한 통속이므로. 모니카 르윈스키한테 꼴렸던~.
항상 말하는 `시장의 원리` 대로 기업과 은행들이 부실 경영한 책임을 물어 그냥 망하게 했다면 기업들은 망했을지언정 그리고, 그로 인해 일정 부분 정부가 비판을 받았을지언정 국가가 IMF에 넘어가 그들의 관리를 받으면서 나라와 국민들이 그 지경까지 가지는 않았을 거라는 진단이 사후약방문으로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버티며 IMF를 거부했던 나라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말레이시아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기업들과 일부 세력은 나라가 망한다며(?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린데. .) 공적 자금 투입을 해서 살려야 한다고 아우성을 쳤었죠. 경제를 망친 놈들이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큰 소리를. 이게 바로 자한당의 전신이었던 신한국당이 우리나라 현대사에 남긴 황홀한 업적입니다. 이후 `차떼기`까지 하다 들켜 당이 공중분해될 위기를 길거리에 나와 천막치고 박근혜 앞세워 읍소전략으로 겨우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연명해왔죠.
그 과정에서 금리는 30%로 치솟고, 실물 가격은 땅에 떨어지게 되었는데 그걸 호재로 삼아 장기 채권을 구입하고, 헐값에 부동산과 건물 등을 매입한 사람들은 막대한 부를 거머쥐며 부자가 되었습니다. 한 번 그 맛을 본 사람들은 또 그런 기회가 오면 서슴없이 공격적인 투자를 하겠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두고 봐야겠습니다.
끝으로 사족을 좀 달자면 97년 IMF는 분명 우리가 자초한 잘못으로 인해 불러들인 화가 큽니다. 하지만, 그걸 노렸다고 볼 수도 있는 국제 금융자본 세력은 한마디로 사악합니다. 백인 양키들이 어떤 놈들인데. . 알고보면 쪽발이들보다 더 믿을 수 없고, 나쁜 것들입니다. 오죽하면 `하얀 악마`라는 말이 나왔을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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