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8. 30. 22:30

“왜적이 얼마만큼 더러운 자들이고, 얼마만큼 원수인가?” 당포전양승첩도

금계 노인, 일본 포로수용소 기록 <금계일기> 남겨
일본 탈출해 명나라 거쳐 귀국 여정의 풍물 등 담아
국립광주박물관, 후손한테서 '금계일기' 받아서 관리

전라도 나주 출신 의병장 노인(魯認·1566~1622)이 쓴 <노인금계일기>(보물 제331호)엔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을 때 꼿꼿한 심경이 오롯이 담겨 있다. 금계일기는 임진왜란 때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던 노인이 명나라로 탈출해 귀국할 때까지의 일본과 중국의 풍물을 기록한 일기다. 노인은 일기에 “오늘에 이르러 죽지 못하여 원수의 밥을 먹고 안녕하지만 부끄럽지 않은가?”라고 적었다.

‘금계일기’는 1599년 2월21일부터 6월27일까지 4개월7일 동안 내용이 앞과 뒤가 끊어진 채 필사본으로 전해지고 있다. 윤종균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관은 “전해지는 것 전후로도 일기를 썼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포로로 보낸 2년5개월가량의 경험 중 4개월여의 일기만 전해져 아쉽다. 그러나 중국 탈출 과정과 체험 부분이 담겨 있고, 지금 전하는 부분만으로도 사료적 가치가 크다”고 말했다.

17살에 진사시에 합격한 뒤 성리학을 공부하던 노인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다. 선생은 약 1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권율(1537~1599) 휘하에 들어가 전쟁에 참여했다. 노인은 1597년 8월15일 남원성 전투에서 화살에 맞고 쓰러져, 일본군의 포로가 됐다. 선생은 일본으로 이송되는 도중에 자결하려고 했지만, 몸이 묶여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일본 포로수용소에서 노인의 문장력이 뛰어나다는 소문이 퍼졌다. 일본 젊은 관리들은 노인에게 부채를 들고 와 글씨와 시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노인은 그들이 두고 간 돈을 모아 통역관을 매수한 뒤 ‘일본 산천의 지세와 호구, 군사정보’ 등을 꼼꼼하게 일기에 기록했다. 일본인들의 풍속·습관과 포로들에 대한 대우, 탈출 경위 등도 적었다.

노인은 1599년 3월17일 일본 와텐슈우(和天州)에서 만난 중국 사신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다. 그는 이미 한 차례 배로 탈출을 시도하다가 실패했던 적이 있었다. 탈출에 성공한 노인은 푸젠성(福建省)으로 가서 조선 송환을 요청해 귀국을 승인받고, 베이징을 거쳐 1600년 1월 한양으로 돌아왔다. 노인은 그 과정에서 중국 관리와 지식인들과 만나 성리학에 대해 문답을 주고받는 등 학문적으로 교류했다.

노인은 귀국 후 선조에게 일본의 상세한 정황을 보고한다. 그리고 1604년 경남 통영 앞바다에 나타난 왜군을 물리치는 데도 공을 세운다. 당시 통제사 이경준과 친적 노홍 등 28명의 장군이 왜군을 격파했다. 당시 전투 상황은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된 ‘당포전양승첩도(唐浦前洋勝捷圖)’에 남아 있다.

https://news.v.daum.net/v/201908301406070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