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17. 17:30

기업들의 독과점 판매행태와 영업방식에 등돌리는 소비자들

소비자가 원하는 건 외제 아닌 `경쟁'

비싸고 사양낮은 국산시장 강타..寡占 안주는 옛말

"진정한 경쟁으로 좋은 제품 내놔야"

아이폰, 캠리, 유니클로, 다이소 등 `외제'는 아직 국내 기업에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다. 휴대전화, 자동차, 가전, 이동통신 등 주요 시장에서 국산 점유율이 90%를 넘고 있다. 국내 시장을 절대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국내 기업들은 "그리 호들갑을 떨 일이 아니다"는 반응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단순한 시장점유율만으로 외제 인기의 의미를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 이면에 있는 소비자들의 심리 변화 그리고 국내 소비시장의 달라진 환경을 깨닫지 못할 경우 언젠가 국내 기업에게 큰 위기가 닥쳐올 수 있다고 이들은 경고했다.

◇ 국산, 더 이상 싸지 않다.

일본차 닛산이 새로 내놓은 2010년형 `알티마'는 2,500cc 모델 가격이 3천390만원이다. 기존 모델보다 가격을 300만원 낮췄다. 반면 편의사양은 강화돼 버튼 시동장치, 고급 오디오, 썬루프 등을 갖췄다. 이 차에 관세가 안 붙는다고 생각해 보자. 관세 및 기타 세금이 10% 가까이 붙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차값은 3천100만원 밑으로 떨어진다. 하지만 국내 자동차업체가 새로 내놓은 2,000cc 중형차 가격은 풀옵션 기준 3,100만원이다. 배기량이 더 작은 국산차가 가격은 비슷한 것이다. 내년에 이 차종의 2,400cc 모델이 나오면 국산차 가격은 오히려 더 비싸지게 된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링 카인 도요타 캠리(2,500cc)의 가격도 알티마보다 100만원밖에 비싸지 않다. 외제차와 국산차의 가격 차이는 관세를 감안하면 사실상 사라진 셈이다.

통신 요금이나 휴대전화 가격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한국소비자원이 미국, 영국, 홍콩 등 주요 15개 국을 비교한 결과 우리나라의 음성통화 요금은 주요 국 중 1위를 차지했다. 2004년 10위, 2006년 7위에서 껑충 뛰어오른 것이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기사에서 "한국은 세계에서 이동통신 시스템이 가장 발달한 나라 중 하나지만, 휴대전화 가격과 무선통신 요금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편에 속한다"고 지적했다.

◇ 소비자들 `스펙 다운'에 분노

우리나라 휴대전화 제조업체들은 세계시장 점유율 2, 3위를 차지하는 `톱 클래스'이다. 프리미엄 제품군에서는 세계 1위의 휴대전화업체 노키아를 위협한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다. 하지만 국내 소비자마저 해외 소비자들이 사용하는 휴대전화를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국내에서 출시되는 인기 휴대전화에는 핵심기능이 일부 빠져있다. 대표적인 것이 `무선랜' 기능이다.

휴대전화에 무선랜 기능이 있으면 무선 인터넷을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다. 소비자들이 자사가 구축한 망을 이용하기 바라는 이동통신회사들로서는 달가울 리 없다. 결국 무선랜 기능을 아예 빼버린 것이다. 최근 아이폰을 산 김동우(28)씨는 "지난해 호주에 머물 때는 길거리에서도 무선랜으로 인터넷을 저렴한 가격에 마음껏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국내에 들어와 보니 무선 인터넷 요금이 너무 비쌌다. 아이폰을 산 이유도 무선 인터넷을 값싸게 이용하기 위해서다"고 말했다.

이처럼 국내 소비자들에게 수출용보다 사양이 낮은 `스펙 다운(Spec Down)' 제품을 파는 행태는 자동차업계도 마찬가지다. 미국시장에 수출하는 자동차에는 6개의 에어백과 차량자세제어장치(ESP) 같은 첨단 안전장치를 기본 장착하면서 내수용에는 이를 옵션 판매하거나 아예 빼버리는 행태는 더 이상 비밀도 아니다.

◇ "소비자 변화 못 읽으면 위기 닥칠것"

전문가들은 국내 기업들이 변화를 원하는 소비자들의 요구를 외면하고 기득권 지키기에만 급급하다면 `외제의 공습'은 갈수록 맹위를 떨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들은 국내 기업이 직시해야 할 현실로 예전과는 사뭇 다른 소비자 환경의 변화를 지적했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국내 소비시장에서 최고의 화두는 `명품'이었다. 브랜드 파워와 높은 품질, 세련된 디자인을 겸비한 옷, 휴대전화, 자동차, 가전 등은 중산층 소비자의 꿈이었다. 저가 제품은 외면당하고 `프리미엄' 이름을 앞에 붙인 고급 제품이 환영받았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집값과 등골을 휘게 하는 사교육비, 만만치 않은 수준의 통신비 등은 중산층의 소비 여력을 줄여놓았다. 명품보다는 합리적인 가격과 적절한 품질을 갖춘 제품을 찾게 된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의 백창석 연구원은 "중저가 브랜드 `유니클로'가 왜 그렇게 인기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이제는 적절한 가격에 품질까지 갖춘 제품만이 소비자들에게 환영받을 것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국내 기업은 변화된 환경의 의미를 아직 철저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소비자들의 명품 선호 현상에 맞춰 국내 기업들은 제품의 질을 고급화시키고 가격을 올려받는 것에 익숙해졌다. 프리미엄 제품만을 쏟아내다 보니 가격은 어느새 외제와 비슷한 수준으로 올라왔다. 합리적인 가격의 외제가 시장을 공략할 수 있는 여건을 국내 기업 스스로 만들어 준 셈이다.

더구나 휴대전화, 가전, 자동차 등의 주요 시장에서 경쟁이 제한된 과점 체제가 형성되다 보니 `스펙 다운' 등에 대한 소비자들의 반감에도 무신경해진 모습이다. IT 칼럼니스트인 김중태 IT문화원 원장은 "아이폰의 인기는 국내 기업들에게 좋은 자극이 될 것이다. 국내 기업들이 이제 환골탈태해야 한다. 변화하지 못하면 몰락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소비자원의 이상식 박사는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은 외제가 아니라 `경쟁'이다. 소비자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장기적인 기업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국내 기업들도 내수 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해 가격을 내리고 품질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 안승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