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8. 24. 21:13

단군세기에 이르기를,

한웅천왕이 처음으로 몸소 하늘에 제사지내고 백성을 낳아 교화를 베풀고 천경(天經)과 신고(神誥)를 가르치시니 무리들이 잘 따르게 되었다. 이로부터 후에 치우천왕이 땅을 개간하고 구리와 쇠를 캐내서 군대를 조련하고 산업을 일으켰다.

때에 구한(九桓)은 모두 삼신(三神)을 한 뿌리의 조상으로 삼고 소도를 관리하고 관경을 관리하며 벌을 다스리는 것 등을 모두 다른 무리와 더불어 서로 의논하여 하나로 뭉쳐 화백(和白)을 하였다. 아울러 지혜와 삶을 나란히 닦으면서 온전함을 이루었다. 이때부터 구한은 모조리 삼한(三韓)에 통솔되고 나라 안의 천제의 아들은 `단군`이라고 불렀다.

'나라를 이루는 길은 먹는 것을 우선으로 하나니, 농사는 사람사는 모든 일의 근본이요. . 마땅히 백성과 더불어 다스려 산업을 일으킬지니라.' 먼저 겨레가 소중함을 가르치시고는. . 국경을 지키고, 화백회의 결과를 공개하며, 서로 위하고 다 화합하는 마음으로써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는 것으로 스스로의 힘을 길렀으니, 바로 어진 정치의 비롯함이 여기에서 시작된 듯 하였다.

庚子年(B.C 2241) 단군께서 천하의 땅을 새로 갈라서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다스렸으니, 삼한은 모두 오가(五加) 64족을 포함하였다.

庚子年(B.C 2181) 아직 풍속이 하나같지 않았다. 지방마다 말이 서로 틀리고 형상으로 뜻을 나타내는 참글(眞書)이 있다해도 열 집 사는 마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백 리 되는 땅의 나라에서도 글을 서로 이해키 어려웠다. 이에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토(加臨土)`라 하니 그 글은 다음과 같았다.

(정음 38자 : 세종실록 癸亥 25년 12월 초에 '十月上, 親製言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이라 하였으니 '10월 초, 친히 말글 28자를 지으시니 그 글자는 옛전자를 모방하였다.')

庚寅年(B.C 2131) 배 만드는 곳을 살수(薩水)의 상류에 설치했다.

戊申年(B.C 1993) 이십분의 일을 세금으로 내는 법을 정하여 널리 쓰이게 하며, 있는 곳과 없는 곳이 서로 보충하도록 하였다.

戊辰年(B.C 1733) 오성집결.

乙亥年(B.C 1666) 관리를 사방에 보내 호구를 조사, 계산하게 하니 총계 1억 8천만이었다.

庚寅年(B.C 1891) 단제께서 오가에 명을 내려 열 두 명산의 가장 뛰어난 곳을 골라 국선(國仙)의 소도를 설치케 하셨다. 많은 박달나무를 둘러심은 후 가장 큰 나무를 골라 한웅의 상으로 모시고 여기에 제사지내며 `웅상`이라고 이름했다.

戊戌年(B.C 1763) 소도를 많이 설치하고, 천지화(天指花)를 심었다. 미혼의 자제로 하여금 글 읽고, 활 쏘는 것을 익히게 하며 국자랑(國子郞)이라 부르게 하였다. 이들은 돌아다닐때 머리에 천지화를 꽂았으므로 `천지화랑`이라고도 불렀다.

辛巳年(B.C 1660) 겨울 10월 양운국과 수밀이국의 사신이 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己丑年(B.C 1652) 가을 7월 우루국 사람 20인이 투항해오니 염수 근처의 땅에 정착하도록 명하였다.

丁未年(B.C 1634) 단제께서 태백산에 오르사 비석을 세워 역대 단군들의 이름과 역대 왕들의 공적을 새겼다.

戊戌年(B.C 1583) 구한의 여러 한들을 영고탑에 모여 삼신과 상제에게 제사지냈으니 환인, 환웅, 치우(14대 자오지 환웅) 및 단군 왕검을 모셨다. 

丙申年(B.C 1285) 11월 몸소 구한의 군사를 이끌고 여러차례 싸워 은나라 서울을 격파하고 곧 화친하였으나 또다시 크게 싸워 이를 쳐부쉈다. 이듬해 2월 이들을 추격하여 황하 주변에서 승전의 축하를 받고 `변한` 백성들을 회대의 땅으로 옮겨 그들로 하여금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게하니, 나라의 위세가 떨쳐졌다.

丙戌年(B.C 935) 남해의 조수가 3척이나 물러갔다. 南海潮水退三尺

乙卯年(B.C 426) 융안의 사냥꾼 우화충(于和冲)이 장군을 지칭하며 무리 수만명을 모아 서북 36군을 함락시켰다. 단제는 병력을 파견했으나 이기지 못했으며, 겨울이 되자 도적들은 도성을 에워싸고 급하게 공격했다. 단제께서는 좌우의 궁인과 함께 종묘사직의 신주들을 받들어 모시고는 배를 타고 피난하여 해두로 가시더니 얼마지나지 않아서 돌아가셨다. 이 해에 백민성의 욕살 구물(丘勿)이 어명을 가지고 군대를 일으켜 먼저 장당경을 점령하니 구지(九地)의 군사들이 이에 따라서 동서의 압록 18성이 모두 병력을 보내 원조하여 왔다.

丙辰年(B.C 425) 3월 큰 물이 도성을 휩쓸어버리니 적병들은 큰 혼란에 빠졌다. 구물단제께서는 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이들을 정벌하니 적군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저절로 괴멸하니 마침내 우화충을 죽여버렸다. 이에 구물은 여러 장수들의 추앙을 받는바 되어, 마침내 3월 16일에 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지내고 장당경에서 즉위하였다. 이에 나라의 이름은 `대부여(大夫餘)`라고 고치고 삼한(三韓)은 삼조선(三朝鮮)이라고 바꿔불렀다. 이때부터 삼조선은 단군을 받들어 모시고 통치를 받기는 했지만 전쟁의 권한에 있어서는 애오라지 한 분에게만 맡겨두지는 않게 되었다. 7월에는 해성(海城)을 개축하도록 하여 평양(平壤)이라 부르도록 하시고, 이궁(離宮)을 짓도록 하였다.

丙辰年(B.C 355) 연나라 사람 배도(倍道)가 쳐들어와서 요서를 함락시키고 운장(雲障)에 육박해왔다. 이에 번(番)조선이 대장군 우문언(于文言)에게 명하여 이를 막게 하고 진(辰)조선, 막(莫)조선도 역시 군대를 보내어 이를 구원하여 오더니, 복명을 숨겨두고 공격하여 연나라, 제나라의 군사를 오도하(五道河)에서 쳐부수고는 요서의 여러 성들을 남김없이 되찾았다.

 

단군세기에 기록된 기원전 오성집결 천체 프로그램 시뮬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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