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유년 4월 초하룻날 서울 의금부에서 풀려났다. 내가 받은 문초의 내용은 무의미했다. 위관들의 심문은 결국 아무것도 묻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헛것을 쫓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언어가 가엾었다. 그들은 헛것을 정밀하게 짜 맞추어 충(忠)과 의(義)의 구조물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들은 바다의 사실에 입각해 있지 않았다. 형틀에 묶여서 나는 허깨비를 마주 대하고 있었다. 내 몸을 으깨는 헛것들의 매는 뼈가 깨어지듯이 아프고 깊었다. 나는 헛것의 무내용함과 눈앞에 절벽을 몰아세우는 매의 고통사이에서 여러 번 실신했다.
나는 출옥 직후 남대문 밖 여염에 머물렀다. 내가 중죄인이었으므로 그들은 직접 나타나지 않았다. 종들은 다만 얼굴을 보이고 돌아갔다. 이 세상에 위로란 본래 없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나는 장독으로 쑤시는 허리를 시골 아전들의 행랑방 구들에 지져가며 남쪽으로 내려와 한달 만에 순천 권율 도원수부에 당도했다.
내 백의종군(白衣從軍)의 시작이었다.'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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