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2. 8. 11:40

광평대군의 죽음에 관한 실록과 야사 두 가지 기록

'석보상절'을 활자 인쇄하려던 광평대군이 밀본에 납치되어 죽임을 당하는 어제 '뿌리깊은 나무'의 내용이 안방극장을 적잖이 충격으로 몰아간 것 같은데, 극의 전개에 갑자기 일진광풍이 몰아치는 것처럼 분위기 반전되며 드라마는 절정으로..

그렇게 드라마를 보다가 문득 들게 된 의문 하나. 과연 광평대군의 일생은 어떠했을까. 자료를 찾아보니 광평대군의 죽음에는 실록과 야사의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신빙성은 실록이 높겠지만 그렇다고 야사를 무시하기엔 의미심장하고 많은 이야기들이 들어있죠.

- 세종 106권, 26년(1444 갑자 / 명 정통(正統) 9년) 12월 7일(임자) 1번째기사

광평대군 이여(李璵)가 졸(卒)하였다. 여의 자는 환지(煥之)이고 호는 명성당(明誠堂)이니, 임금의 다섯째 아들이다. 홍희(洪熙) 원년 을사(乙巳) 5월 임신일(壬申日)에 나서, 선덕(宣德) 7년 임자(壬子) 정월에 광평 대군에 봉하였다. 나이 어릴 때부터 학문에 힘써서 《효경(孝經)》과 《소학(小學)》과 사서 삼경(四書三經)을 다 통하고, 《문선(文選)》과 이태백(李太白)·두자미(杜子美)·구양수(歐陽修)·소동파(蘇東坡)의 문집들을 두루 열람하였고, 더욱 《국어(國語)》와 《좌전(左傳)》에 공부가 깊었으며, 음률(音律)과 산수(算數)에 이르기까지도 그 오묘(奧妙)한 이치를 다 알았다.

글을 잘 짓고 글씨의 필법도 절묘하였으며, 강한 활을 당겨서 멀리 쏘고, 또 격구(擊毬)에도 능하였다. 임금이 간의대(簡儀臺)와 종부(宗簿)의 일을 총관(總管)하기를 명하였더니, 종합하고 정리함에 체제를 세웠었다. 임금이 무안군(撫安君)의 후사(後嗣)가 없음을 추념(追念)하여 입후(立後)를 시켜서 그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여(璵)가 창진(瘡疹)을 앓고 있었는데, 임금이 심히 근심하여 여러 방법으로 치료를 했으나 끝내 효과를 얻지 못하고 죽으니, 임금과 중궁이 몹시 슬퍼하여 3일 동안 조회를 거두었다.

여는 성품과 도량이 너그럽고 넓으며, 용모와 자태가 탐스럽고 아름다우며, 총명하고 효제(孝悌)하여 비록 노복이나 사환이라도 일찍이 꾸짖지 아니하매,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였다. 시호(諡號)를 장의(章懿)라고 하였으니, 공경하고 삼가고 높고 밝음이 장(章)이고, 온화하고 부드럽고 현명하고 착함이 의(懿)이다. 아들이 하나이니 이름은 이부(李溥)이다.

다음은 야사에서 전해지는 이야기.

세종대왕은 다섯번째 아들인 광평대군의 운명에 대해 신분을 숨기고 점을 보게 하였다. 점쟁이는 점을 치는 대상이 광평대군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상태로 점을 쳤는데,그 결과 「이 사람은 젊은나이에 못 먹어서 굶어 죽을 운명」이라고 예언하였다. 세종대왕은 얼토당토 않은 예언이라고 생각했다.

세종대왕은 『임금의 아들이 어찌 굶어 죽겠는가?』라고 하면서 역시 점을 치는 것은 미신일 뿐이라고 웃었다. 하지만, 그래도 만약을 대비해서 광평대군에게 사고 팔 수 없이 영원히 유지되는 땅에 대한 권리를 내려서 결코 먹을 것이 부족하지 않도록 제도를 마련해 주었다.

1444년. 20세의 광평대군은 어느날 밥을 먹다가 생선가시가 목에 걸리게 되는 되었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이 가시를 뽑을 수가 없었다. 결국 광평대군은 목에 걸린 가시 때문에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괴로워하다가 굶어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