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4. 27. 10:13

점점 커지는 ‘가계부채 폭탄’…정부 두 손 들었나?


한계 다다른 '폭탄 돌리기'‥더는 미룰 수 없다
소비 짓누르는 가계 부채‥경제 기반 흔들

정부의 ‘가계부채 폭탄 돌리기’도 이제 한계점에 다다른 분위기다. 24일 한국은행과 통계청, 금융감독원은 공동으로 25일부터 다음달 15일까지 전국 2만여 표본가구를 대상으로 ‘가계금융·복지조사’를 실시한다고 밝혔다.

이 는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가계부채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자 정부에서 본격적인 관리 및 구조 개혁에 돌입하려는 모양새로 풀이된다.금융권 관계자는 “지난해의 저축은행 사태와 비슷한 상황”이라며 “그동안 줄곧 뒤로 미뤄오다 더는 버틸 수 없게 되자 어쩔 수 없이 메스를 잡은 것”이라고 냉소했다.

◆ 임계치 넘은 가계부채…소비 짓눌러 경제 회복 방해

“부 채 수준이 가계가 감당할 수 있는 임계점을 넘어섰다”는 데 금융권과 정부 각 부처들이 동의하고 있다.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말 현재 가계부채 잔액(가계신용기준)은 912조9000억원에 달했다. 2005년 이후 연평균 9.0% 가량의 가파른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무엇보다 가계부채의 확산으로 이자 부담이 너무 커지면서 가계의 소비까지 짓누르고 있다는 점이 두통거리다.

한 은은 22일 발표한 ‘부채경제학과 한국의 가계 및 정부 부채’ 보고서에서 지난해 4분기 국내 도시 근로자의 가계소득 중 이자로 내는 돈의 비율(이자상환비율)이 2.8%에 달했다고 밝혔다. 이 비율이 2.5%를 넘으면 부채 부담 때문에 소비가 급격히 위축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과거 이 비율이 2.5%를 넘은 때는 외환위기 당시인 1998년 1분기부터 1999년 4분기까지였다.

보 고서를 작성한 박양수 한은 계량모형 부장은 “부채가 과도해지면 원리금 상환 부담이 커진 가계는 소비를 줄인다. 이는 기업 매출 감소와 가계소득 감소로 이어져 다시 가계부채 부담이 커지는 악순환으로 연결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실제로 노무현 정권 당시 부동산 가격이 급등한 이후 빚을 끼고 집을 샀다가 원리금 상환 부담 탓에 소비를 극도로 줄이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지난 2007년부터 2011년까지 가계 소비 증가율은 연평균 2.5%로 GDP 성장률(3.4%)을 밑돌았다.지난해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의 비율은 135.5%로 전년도의 131.7%에 비해 3.8%포인트 올랐다.

같은 기간 원리금상환액을 연 소득액으로 나눈 원리금상환부담률(12.9%) 역시 1.5%포인트 상승했으며, 원리금상환부담률 40%가 넘는 과대채무가구 비중도 3.1%포인트 늘어났다. 저신용등급의 연체율도 계속해서 상승 추세다.가 계부채가 소비를 짓누르는 악영향은 이미 사회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김중수 한은 총재를 비롯한 여러 정부 요인들이 “올해는 내수가 성장을 이끌 것”이라고 진단했으나 생각보다 소비가 살아나지 않으면서 유통업계는 1분기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소매유통업 경기전망지수는 올해 1분기(101)까지 하락세가 계속되다가 2분기에야 105로 반등했다. 1~2 월 누계신장률 -1.9%를 기록했던 대형마트들은 3월 들어서 겨우 이마트 3.9%, 홈플러스 6.8%, 롯데마트 5.5% 등 회복세를 보이고 있으나, 이마트 관계자는 “설 특수까지 사라질 정도로 내수 시장이 급격히 얼어붙었었다고 말했다.

부동산시장에서도 완전 매수세가 사라졌다. 한 강남권 부동산 관계자는 “최근 집을 사려는 손님을 찾아보기 힘들다” 면서 “집값은 이미 대세 하락 추세이며, 그 진바닥을 알 수 없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국 토연구원은 지난 18일 3월 전국 ‘부동산시장 소비심리지수’는 전달보다 3.2포인트 하락한 111.4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주택매매시장 소비심리지수는 85.6으로 전달(87.5)보다 1.9포인트 떨어졌다. 박양수 부장은 “심각한 가계부채 때문에, 더 이상 방치하면,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 자체가 약화될 수도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가계부채로 인해 예상되는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범정부적인 대책도 마련되고 있다. 한 은, 통계청, 금감원은 오는 25일부터 다음달 15일까지 전국 2만여 표본가구를 대상으로 ‘가계금융.복지조사’를 공동으로 실시다. 조사 대상은 부채 부문에서 대출금액, 대출기관, 금리 등이며, 소득 수준이나 경제활동 상태에 따라 가계부채가 어떻게 분포하는지 분석할 예정이다. 통계청 관계자는 “미국과 유럽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가계금융조사를 했듯이 우리도 가계부채 대책을 세우기 전에 먼저 실상을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며 “경제활동과 보육 위주인 조사 항목을 차차 늘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

◆ 왜 정권 말까지 질질 끄나? 사라지지 않는 ‘폭탄 돌리기’

한 은 고위 관계자는 “때때로 우리나라도 중세 베네치아처럼 대통령의 임기를 종신으로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며 쓰게 웃었다. 여러 대통령들이 자기 임기 내에 안 좋은 일이 터지는 것을 막고 다음 정권에 떠넘기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문제만 더 키우는 모습을 비꼰 표현이다.

실제로 과거 대통령들이 최소화시킬 수 있었던 사안을 숨기다가 더 크게 부풀려 참혹한 결말을 맞은 사례는 여럿 있다. 그리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이 부담해야 했다. IMF 외환위기도 김영삼 정권이 외화 부족을 숨기고 금융 개혁을 미루다가 정통으로 맞았다. 김 대중 정권은 ‘카드 부실’을 훌륭히 다음 정권에 떠넘기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치료 시기를 놓친 탓에 노무현 정권이 출범하자마자 카드사의 대형 부실과 함께 신용불량자 300만이 양산되는 ‘카드 사태’가 발발, 국내의 경제 활력이 꽁꽁 얼어붙었다.

‘MB 정권’ 역시 마찬가지. 저축은행 PF부실은 지난 2008년부터 문제시됐지만, 사실을 축소.은폐하려고만 하다가 2011년 대형 폭발을 일으켰다. 그 부실 규모는 김석동 금융위원장이 운운한 ‘10조원’을 훨씬 뛰어넘었으며, 수백만의 서민들이 피해를 입어야 했다.가계부채도 지난 2009년 700조원을 넘길 때부터 이미 경고의 목소리가 있었다.

한은의 ‘부채경제학과 한국의 가계 및 정부부채’ 보고서에 따르면 2009년 4분기부터 부채가 소비를 짓누르는 임계점인 이사상환비율 2.5%를 넘어선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금융당국 관계자는 기업 구조조정을 강조하면서도 “구조조정 때문에 가계부채 문제가 더 심각해질 우려가 있다”며 이면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금융권 일각에서는 “가계부채를 더 이상 방치하면 감당 못할 괴물이 될 수 있다”는 경고도 나왔다.그러나 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오히려 금리를 낮추고 막대한 유동성을 풀어 가계 부채 확대를 부채질했다.

결 국 가계부채는 2009년 737조원에서 2010년 797조원, 2011년 858조원을 거쳐 2012년 912조원까지 눈덩이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간 시중에 풀린 유동성과 재고 효과로 인한 ‘에코 버블’ 때문에 우리나라 경제는 ‘반짝’ 회복한 듯 보였지만, 지금은 막대한 가계부채가 경제의 기반을 통째로 갉아먹고 있다.

한 시중은행 여신사업부 관계자는 “지금 상상 이상으로 심각한 상태”라 면서 “아직까지 부동산 대출을 받은 후 이자만 갚고 있는 채무자들에게 곧 원금 상환의 시기가 도래한다. 그들의 대출 연체와 부동산 가격 하락이 겹쳐질 경우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는 비교도 안 되는 대혼란에 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뒤늦게 정부는 지난해말부터 가계부채 단속을 벌이는 등 분주한 모습이지만, 시장은 싸늘한 시선만을 보내고 있다.

세계파이낸스 / 안재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