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5. 4. 15:51

깨달음 이후 빨랫감

2000년대 중후반, 아직 `동보서적`이 있었을때 보통 서면을 가면 꼭 책을 구입하지 않더라도 한 번 들러 이 책 저 책 둘러보는게 일상다반사였는데 다른 사람들도 그 곳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정하는 장소로 많이 활용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서점의 책들을 구경할때 보통 분야가 좀 정해져 있어 컴퓨터 프로그램 언어, 천문학, 영어, 불교, 역학점술, 무술 코너들 일대를 한바쿠 순회하곤 했습니다. 웃긴건 정작 전공 분야는 그냥 지나치기 일쑤였죠.

이 책을 구입한 이유는 제목 때문이었는데 표지를 보는 순간 특이한 카피에 왠지 사야할 것같은 생각에 사로잡혀 예정에도 없었고, 적지 않은 금액임에도 선뜻 들고 나왔습니다. 물론 카운터에서 계산은 했구요. 집으로 오면서도 줄곧 '깨달음 이후에 남아있는 빨랫감이는게 무얼까'라는 생각을 내내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기 망설여졌던 이유가 그때는 깨달음이라는게 아주 추상적인 개념으로 다가왔고, 뭔지를 몰랐던 상태에서 아직 깨달음이라는 것도 모르는데 그 다음의 남겨진 걸 알기보단 먼저 읽으려고 했던 책들부터 보기로 했고, 그 중에는 법화경과 유마힐 소설경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그때부터 책장 한 켠에 계속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그 사이 독서를 마친 책의 수는 늘어갔습니다.

그러다 올 초부터 자꾸 이 책이 눈에 들어왔는데 물론 그 이전에도 가끔 이 책을 쳐다보긴 했지만, 그냥 이제는 좀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에 꺼내서 읽어나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럼 그 사이에 깨달음이라는 걸 얻었느냐?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평생가도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라도 손에 든 이유는 깨달음이 있든 말든, 빨랫감이 생기든 말든 그게 아무 상관없고 책이라는 건 그냥 읽으면 되는거였기에 그런거죠. 그래도 제목이 주었던 인상은 꽤 묵직했습니다.

책에는 불교나 요가 수행을 하는 많은 사람들의 체험이나 경험을 토대로 그들이 가졌던 느낌과 감정, 그로 인한 성취와 그렇게 인생을 보는 관점 등을 수기 형식으로 소개하는 내용과 저자의 해설 및 철학, 그리고 여타 다른 이야기들이 들어있습니다. 빨래나 청소, 목욕은 한 번으로 끝낼 수 없는 것처럼 깨달음이라는 것 역시 긴 인생에서 한 번만에 끝난다고 볼 수도 없고, 또한 그 이후에도 우리가 살면서 해야하는 잡다한 것들은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기에 깨달음 여부와 상관없이 그냥 할때 하는 거라고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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