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인 삶의 네 가지 길
. . 수행의 길에 대해 제자가 묻자, 붓다는 영적인 삶에는 네 가지의 길이 있다고 설명했다. 첫 번째 길은 빠르고, 즐거움이 있다. 이 길에서는 열림과 내려놓음이 마치 순산처럼 환희와 황홀경과 함께 자연스럽게 찾아온다. 두 번째 길은 빠르지만 고통스럽다.
이 길에서는 강력한 임사 체험이나 사고, 사랑했던 사람과 사별하는 것 등을 겪을 수 있다. 이 길에는 내려놓기를 가르쳐주는 불타는 문이 있다. 세 번째의 영적인 길은 기쁨을 수반한 점진적인 길이다. 이 길에서는 열림과 내려놓음이 여러 해에 걸쳐서 일어난다.
그리고 그것은 대체로 쉽고 즐겁다. 가장 흔한 네 번째 길은 느리고 점진적이지만 대체로 고통을 통해서 일어난다. 고난과 몸부림이 되풀이되는 주제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통해 조금씩 깨어나기를 배운다. 이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은 각자의 삶의 패턴, 때로 `운명`, 혹은 `카르마`로 표현되는 그것의 반영이다. 그 길이 빠르든 느리든 간에 우리는 그 길에 그저 자신을 맡겨야 한다. 사실, 우리는 자신의 진척을 헤아리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망망대해 위의 작은 나룻배에 타고 있는 것과 같다.
우리는 노를 젓지만 한 편으로는 큰 물결이 배를 밀기도 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뱃머리를 동쪽으로 향하지만 정작 얼마나 갔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거리와 시간의 문제는 처음에만 일어나는 문제다. 자신이 얼마나 갔다고 생각하든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 길을 결정짓는 것은 지금 여기서 마음을 근본적으로 열고자 하는 반복적인 노력과 꾸준한 의지에 달려 있다. 정확히 하자만 붓다가 설명한 영적 개화의 이 네 가지 길에다 다섯 번째를 더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노력도, 속도도, 여행과도 상관없는 길이다.
일체성의 문이나 슬픔의 문을 통과하는 대신 우리는 `문없는 문`을 지나간다. 그 모든 여행과 몸부림 따위가 하나의 환영임을 깨닫는 것이다. 그가 향하고 있는 곳은 바로 여기이다. 이것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깨달음이 발견되는 두 가지 상보적인 방법을 알 필요가 있다.
한 가지는 애쓰고 노력하는 길이다, 다른 한 가지는 애쓰지 않는 길이다. 애쓰는 길에서는 자신을 정화하고, 모든 장애물을 치우고 지금 이곳에 있으려고 애쓰고 자신을 깨달음에다 온전히 쏟아부음으로써 다른 모든 것들이 떨어져나가게 한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유일한 집착인 깨달으려는 욕망을 내려놓지 않으면 안되게 된다.
그리고 이 놓아버림을 통해 모든 것이 확연해진다. 애쓰지 않는 길에서는 어떤 몸부림도 없다. 오로지 지금의 현실에 자신을 열 뿐이다. 무위 자연의 느낌 속에 머무는 것, 그것이 요구되는 것의 전부이다. 이로부터 모든 이해와 자비가 따라온다.
사실은, 때에 따라 우리는 이 두 가지 길을 다 가고 있다. 두 길이 다 우리를 내려놓음으로 이끈다. 나의 스승 중 한 분인 디파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 두 길이 다 최선의 길이다." 다만 지혜로운 노력이 중요할 뿐이다.
- 깨달음 이후 빨랫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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