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9. 29. 13:46

그대 안의 호랑이를 길들여라

이 책을 펴는 순간 참 편안해집니다. 그건 이 책을 펴보는 순간 알 수 있습니다. 가끔 두꺼운 책을 집어들게 되면 부담이 느껴지곤 하는데 이건 그런게 전혀 없으니 마치 책을 읽는다기 보다는 명상을 한다는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명상집이라는 말도 있나 보군요. 틱낫한 스님은 여기서 우리들에게 호랭이 얘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응? 나 말이야~..?

니가 아니고, 여기서 말하는 호랑이라는 것은 무지한 대중의 `감정`입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화`와 `두려움`... 이 두 가지의 실체와 이에 대처하는 자세가 스님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가 되겠습니다. 우선 `화`라는 것은 말 그대로 불길같이 맹렬하게 타오르는 감정입니다. 이건 그 속성처럼 우리 내부를 모두 태워버립니다. 불은 오행의 속성상 '사방지지' 즉 뻗어나가지 않는 곳이 없다고 했으니 태울수 있는 모든 걸 다 태운 후에라야 꺼지는 손해가 막심한 재앙입니다. 근데, 호랑이팔자 상팔자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화를 대처해야 할까요. 스님은 그 화라는 것을 달래주어야 할 아이로 대하고 있습니다. 키울수록 커지는 불이지만 달랠수록 잦아드는 불씨의 개념으로 이해하면 좋을 듯 합니다. 사람들이 착각하거나 잘못 생각하기 쉬운 게 감정이라는 것은 곧 자신이 아닙니다. 그 느낌이 너무나 생생하고, 강렬해서 감정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건 너무 당연한데 마치 물이 흘러가는 것을 보듯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그 감정이라는 아이를 제3자의 입장에서 관찰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사념처 `위빠싸나`의 일부입니다. 그렇게 보다 보면 어느 순간 이 감정이라는 게.... "요~~~물! 오빠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하는 요~~~~물!!" 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근육도 쓰면 발달하듯이 뇌의 뉴런과 시냅스 배열로 기억되는 이 화학적 합성의 산물인 감정도 계속 생각하다 보면 그것이 굳어지게 되는데 그러면 거기에 집착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걸 생각해 볼 필요도 있습니다. 우리가 집착하는 그 감정은 우리에게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감정과 자신은 별개의 것이라는 결과가 나옵니다.

그 다음 감정인 두려움. 이것도 깨달음의 경지에 네 가지를 (개콘 네가지 말고) 무서워 하지 않는 `사무외`의 경지가 있듯 사실 우리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죠. 원래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근원적인 두려움을 가지고 태어나는 듯 합니다. 본능적으로 어둠에 대한 두려움, 특정한 대상에 대한 두려움... 그 외에 국민들에게 겁을 주려는 세력들이 심어주는 두려움들까지. 자식을 사랑으로 웃으면서 대하는 것과 굳은 표정으로 엄하게 대하는 것 중 어느게 좋을까요. 물론 때에 따라 적당히 삼선짬뽕을 해야겠지만. 짬뽕 좋아하는데 요샌 해산물 땜시 안 먹고 있음. 젠장~, 요새 딱 한그릇 하기 좋은데. 이거 참 갑자기 글이 낯설다..

위에서 말한 책을 펴는 순간의 편안함이 어떤건지 궁금할까봐 책 내용을 한 두어 장 같이 올려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