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4. 28. 12:14

충무공 이순신장군 탄신일과 임진왜란 해전사 홈페이지

`정조`대왕이 치세기간중 이순신 장군에 대한 재평가를 통해 그 위업을 기리고 `영의정`으로 추증했습니다. 이는 선왕조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한데 그것을 무릅쓰고 올바른 것을 행한 정조의 훌륭한 업적이라 할 것입니다.

4월 28일... 오늘은 `충무공 이순신` 호국대장군님의 탄신일입니다. 참으로 흥미있는 것은 이순신 장군이 어렸을 적부터 두각을 나타냈던 소위 `엘리트`가 아니라 2류 였다는 것이죠. 거의 3류로 떨어질뻔 하기도...^^.

왜, 위인전 보면 대체로 <...어렸을 때부터 남달랐고... 나이 언제 되던 해 이러저러한 일로 신동이라는 칭찬이 자자...> 뭐, 이런거요. 그런 위인들이 임진왜란 당시 적지 않았는데(오성과 한음 등) 어쨌든, 이순신 장군은 `과거`에도 낙방하고 타향을 떠돌던 당시로서는 별 대책이 없었던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32세의 나이에 겨우 급제하고 나서도 미관말직으로 북쪽 변방을 전전하며 충실히 임무에 전념했으나 부패한 상관들에게 굽히지 않아서 출세가 막히던 중, 때를 만나 운명이 그를 이끌어 역사의 중심에 홀로 우뚝 서게 되니 부하 장수들의 절대적인 충성을, 만 백성들의 존경을, 적들의 두려워함을, 군왕의 견제와 시기함을 한 몸에 받게 됩니다.

조정의 지원 하나 없이 무기와 화약 등의 군비를 조달하고 군사들을 먹이시며, 백성들의 생활까지 돌보면서 몸이 불편한 가운데서도 적과 대치하면 죽을 힘을 다해 전투에 임하셨던 장군에게는 천만 마디의 찬사조차도 부족할 것입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현재 장군님의 실제 초상화가 없다는 겁니다. 위 사진은 전해지는 기록 한 줄을 토대로 그린 상상화입니다. 그 외에 전해져 오는 말로는 [...키가 170cm 정도에 용모는 단아하며 보통 체격이고, 약간 내성적인 성격이면서 부하들에게 자상했다...]고 합니다.



<영웅은 고독하다 했던가... 그때... 거기에... 장군님께서 계셨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초대 삼도수군통제사와 임진왜란 해전에 관한 자료가 굉장히 잘 정리되어 있는 홈페이지가 만들어졌습니다.

주소는 http://www.yi-sunsin.com/main/



작년에 만들어져 오래되진 않은 곳으로 영어와 중국어, 일본어 서비스(English, Chinese, Japanese Service)까지 되고 있습니다. 각 해전별로 애니메이션 동영상을 볼 수 있어 3D 해전 체험을 해볼 수도 있습니다.



임진왜란 최고의 히어로, `28전 28승`의 해전 신화가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되어 있고 자료 또한 방대하여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알아볼 수 있는데, 아직까지 커뮤니티나 게시판은 그다지 활성화가 안되어 있다는 느낌입니다.



장군님하면 빼놓을 수 없는 `백의 종군`... 백의종군로를 3D 싸이버로 장군님과 함께 따라 걸어봅시다. 체험 후기를 쓸 수도 있습니다.  



장군님께서 걸으셨던 백의종군 행로..



'나는 정유년 4월 초하룻날 서울 의금부에서 풀려났다. 내가 받은 문초의 내용은 무의미했다. 위관들의 심문은 결국 아무것도 묻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헛것을 쫓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언어가 가엾었다. 그들은 헛것을 정밀하게 짜 맞추어 충(忠)과 의(義)의 구조물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들은 바다의 사실에 입각해 있지 않았다. 형틀에 묶여서 나는 허깨비를 마주 대하고 있었다. 내 몸을 으깨는 헛것들의 매는 뼈가 깨어지듯이 아프고 깊었다. 나는 헛것의 무내용함과 눈앞에 절벽을 몰아세우는 매의 고통사이에서 여러 번 실신했다.

나는 출옥 직후 남대문 밖 여염에 머물렀다. 내가 중죄인이었으므로 그들은 직접 나타나지 않았다. 종들은 다만 얼굴을 보이고 돌아갔다. 이 세상에 위로란 본래 없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나는 장독으로 쑤시는 허리를 시골 아전들의 행랑방 구들에 지져가며 남쪽으로 내려와 한달 만에 순천 권율 도원수부에 당도했다.

내 백의종군(白衣從軍)의 시작이었다.'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