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승과 대승 4
성문(pratyeka-buddha)이란 곧 수도원(사원)내에서 고립된 생활을 하면서 자기들끼리 서로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으면서 절차탁마 수행하는 자들이요, 독각이란 선생이 없이 혼자 산속 같은데서 도사연하면서 깨들음을 추구하는 자들, 즉 '토굴파'들을 가리킨 말이었다. 바로 이들 새로운 진보세력이 이 성문, 독각의 二乘에 대하여 새롭게 내걸은 一乘이 바로 "보살(bodhisattva)"이라는 새로운 개념이었다. 새 포도주는 새 포대에 담아야 한다! 보살이라는 개념은 곧 그들이 추구하는 새 생명과도 같은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있는 새 포대였던 것이다. 이 새 포도주를 우리가 보통 '대승(大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대성이란 '보살운동'이다. 즉, 보살이라는 개념 이전에 대승이 없고, 대승은 보살과 더불어 출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살이란 무엇인가? 절간을 신나게 나돌아 다니는 '자유부인들'인가? 새절 짓는 기왓장에 이름 올리는 부잣집 '마나님들'인가? 아니면 스님들 공양을 지어올리는 절간 부엌의 '공양주들'인가?
'bodhisattva'는 'bodhi'라는 말과 'sattva' 두 마디로 이루어져 있다. 'bodhi'는 '菩提' 즉 '깨달음'이다. 'sattva'는 '살아있는 자' 즉 '有情'이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모든 산 자!' 그들이 곧 '보살'인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sattva'는 '마음'의 뜻이 되기도 하고, '바램'의 뜻이 되기도 한다. 이에 따르면, 보살은 '깨달음을 바라는 모든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보살운동의 혁명적 성격은 바로 보살이 곧 佛位요 佛乘이라는 것이다. 보살이 부처 자신의 원래 모습이라는 것이다.
싣달타가 곧 보살이었고, 이 보살은 곧 붓다 즉 覺者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보살은 아라한의 정면부정이 되는 셈이다. 아라한이 승가라는 제도의 보호를 받는 특수한 규율의 출가자에 국한되었다면 보살은 출가자, 재가자, 가르치는 자, 가르침을 받는 자를 가리지 않는다. 보살에는 승, 속의 이원적 구분이 사라지는 것이다. 종교적 세계와 세속의 세계에 근원적 구분이 사라지는 것이다. 모든 차별주의(distinctionism)여! 안녕~!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의 '보살'에 대한 교과서적 이해는 대강 이러한 것이다. '보살'이란 부처가 될 수도 있는 사람인데, 부처가 아니되고, 중생의 구제를 위해 사회적으로 헌신하는 자, 소승이 자기 일신만의 구원을 추구하는데 반하여 대승은 일체 중생과 더불어 구원받기를 원하는 자, 즉 소승은 피안으로 자기 혼자만 걸어가는데 대승은 많은 사람과 함께 같이 걸어가기 위해 큰 수레가 필요한 자, 그 자가 곧 대승이다!
이러한 규정이 구체적으로 불경에 근거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 소승에 대한 즉, '보살'에 대한 이해를 아주 그르치게 만드는 잘못된 것이다. 중생 구제에 있어 개인과 집단의 기준으로 소, 대승을 나누는 것은 편협하고 단순한 견해다. 해탈에 이르는 길에는 인간과의 '관계'가 없을 수 없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에 혼자 사셨는가? 언제나 사부대중들과 함께 하시지 않았는가. 한 사람 만 사람의 양적 차이에 의해서 아라한과 보살의 차이가 가려질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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