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승과 대승 6 (끝)
반야사상에 대한 최초의 명료한 규정은 '금강경'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대승의 의미는 '金剛能斷'이라는 지혜의 실천, 곧 금강경이 설하는 지혜를 바탕으로 사회적인 실천을 하는 자에게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
금강의 지혜, 즉 반야란 무엇인가? 그것이 곧 부처의 三法印중의 가장 궁극적 法印이라 할 수 있는 '제법무아(諸法無我)'에 대한 가장 심오하고 보편적인 규정이다. '금강경'은 '무아'의 가장 원초적 의미를 규정한 대승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많은 중생을 제도한다고 하는 그 자체에 보살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많은 중생을 제도하는 내가 있지 아니하다고 하는 아상의 부정, 금강경에서 말하는 四相(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의 부정에 곧 그 보살의 진실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현재 한국 대부분의 스님은 소승이다. 한국불교는 소승불교다. 왜냐하면 그들은 법당에 앉아 있는 스님들이고 절간에 들락이는 신도들을 보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밥먹을 때도 따로 먹어야 하고, 수도할 때도 따로 결제를 해야하고, 옷도 따로 입어야 하고, 방석조차도 다른 방석에 앉아야 하고, 모든 진리의 척도가 그들 중심이 되어있는 것이다.
공양주보살은 당연히 공양을 바쳐야 할 아랫것들이고, 자기들은 당연히 공양을 받아먹어야 할 윗것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스님들이 자신을 보살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을 보살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아라한이지 보살이 아닌 것이다.
현재의 스님과 보살의 개념이 바뀌어야 한다 ! 부엌칸의 공양주보살이야말로 스님이요, 료사채의 자신들이야말로 보살이 되어야하는 것이다. 한국의 승려들은 모두 아무개 스님이 아니라 아무개 보살로 모두 그 이름을 바꾸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대승이 되는 것이다. 대승의 기준은 '큰 수레'가 아니다. 대승의 기준은 '무아'일 뿐이다. 무아의 반야를 실천하지 못하는 자, 남북을 막론하고, 동서를 가리지 않고, 고금을 물론하여 다 소승일 뿐인 것이다 ! 어찌 소승, 대승이 고정된 함축적 의미나 대상을 가질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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