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2. 28. 16:16

소승과 대승 5

부처가 될 수 있는데 부처가 아니되고 보살노릇한다는 말도 어찌보면 어색하다. 부처가 될 수 있으면 언제고 그 자리에서 부처가 되어야지, 어찌 부처가 되면 대중을 구원할 수 없고, 부처가 아니되고 보살로 머물러 있어야만 대중 구원이 가능하다는 말이 성립한단 말인가. 이는 `불법`의 본질을 흐리는 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가 된다는 것과 보살이 된다는 2원적 구분을 두기 보단, 부처가 곧 보살이요, 보살이 곧 부처다! 라는 인식이 요구된다. 지장보살이 어찌 부처가 아니겠는가. 지금 이러한 보살의 사회성에 관한 논의는 원래 인도사상의 `회향(廻向, parinama)` 개념에서 발전된 것인데, 회향에는 두 가지가 있다. 제 1의 회향이란, 선근을 자기의 `행복` 추구로부터 자기의 `깨달음`의 추구로 방향전환하는 것이다. 제 2의 회향이란 곧 나의 선근을 자기의 행복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깨달음과 행복으로 돌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 2의 회향은 제 1의 회향의 전제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제 2회향은 제 1회향의 논리적 결과이다. 성불이야말로 보살행의 전제며, 보살행이야말로 성불의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제 1 회향은 무상정등정각을 얻는 것이요, 제 2의 회향은 그 얻은 무상정등정각을 타인의 깨달음으로 전위시키는 것이다.

아라한 팔정도(八正道)의 궁극에는 正定(samyak-samadhi)이라고 하는 관조적인 三昧가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보살의 '육파라밀(六波羅蜜)'의 궁극에는 바로 '반야(般若)' 즉 지혜 `쁘라기냐`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제 1회향의 완성은 바로 이 반야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요, 이 반야를 획득한 자에게만이 제 2의 회향이 가능케되는 것이다. 이 반야를 최초로 명료하게 제시한 경전이 바로 `금강경`이 된다.

소승과 대승의 궁극적 구분근거가 바로 `보살`이라는 새로운 개념이다. 그렇다면 다시 보살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일체의 '차별주의'를 거부하는 一乘(ekayana)인 것이다. 一乘이란 곧 나만이, 혹은 내가 속한 어느 집단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일체의 구분의식이나 우월의식 혹은 특권의식의 거부를 말하는 것이다. 이 우월의식, 특권의식의 거부가 곧 대승의 출발인 것이다. 이 대승정신이 바로 보살정신이요, 이 보살정신이 바로 반야사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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