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2. 26. 14:54

대기업 물밑 `조용한 해고` 시작됐다

`L 공포`의 기습, 대기업 중심으로 비공식적 감원
글로벌 경기 직격탄에 경직된 고용 문화도 한몫
중견·중소기업으로 확산 땐 `태풍급 한파` 될 수도

기업들이 인원을 줄이는 건 코앞에 닥친 경기 침체와 실적 악화 우려에서다. 새 정부가 들어선 지 얼마 안 돼 대외적으로 채용 축소나 구조조정을 이야기하기 힘든 것 같다. 과거의 인적 구조조정이 ‘공식적’이었다면, 지금은 물밑에서 ‘조용한 해고’가 이뤄지고 있다.

이처럼 경기 침체가 장기화할 것이란 우려가 커지면서 국내 고용 시장에 ‘조용한 해고’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 공식적인 구조조정이나 희망퇴직 대신 간접적인 방식으로 인력을 줄이고, 비용을 절감하는 것을 말한다.

글로벌 경기 하락 이후 대기업이 간접적으로 일자리를 줄이는 '조용한 해고'에 나서고 있다. 희망퇴직이나 정리해고 요건이 까다로운 상황에서 간접적 구조조정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사진은 서울 중구의 사무실 밀집 지역의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시민들. 연합뉴스

최근 화제가 됐던 ‘조용한 사직(Quiet Quitting)’이 ‘주어진 최소한의 일만 하며 건강한 삶을 우선한다’는 의미라면, ‘조용한 해고’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일자리의 단절을 의미한다. ‘L(layoff·해고)의 공포’가 새로운 얼굴로 습격한 셈이다.

이지만 연세대 경영대학장은 “희망퇴직 제도가 도입된 이후에도 임금 체계를 합리적으로 개편·조정하지 못하면서 경기 불확실성을 우려하는 기업이 ‘조용한 해고’를 선택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해고하기 힘든 노동시장 경직성과 정부 등 외부 시선에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 글로벌 경기에 휘청이는 산업구조도 조용한 해고를 부추기고 있다”고 덧붙였다.

미국에선 테크기업에 다니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조용한 사직’ 열풍이 일고 있지만 고용 시장은 안정적이다. 미국 노동부에 따르면 지난달 실업률은 3.7%로 사실상 완전고용 상태다. 코로나19 회복에 따라 노동력 수요가 상승하고 있어서다.

반면, 한국은 대기업을 중심으로 ‘조용한 해고’라는 고용 삭풍이 불어닥쳤다. 이는 중소·중견 협력기업의 폐업이나 구조조정 같은 ‘태풍급 일자리 한파’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 고용 시장이 직격탄을 맞는 셈이다.

이미 실적이 크게 악화했거나 악화를 예상하는 기업들은 공식적으로 감원 절차에 들어갔다. 롯데면세점이 창사 이후 첫 희망퇴직 신청을 받고 있고, 롯데하이마트도 희망퇴직 대상자를 찾았다. LG전자 계열사인 하이프라자와 하이트진로, 오비맥주 등이 희망퇴직을 진행했다.

희망퇴직이 ‘상시화’한 금융권도 마찬가지다. 하이투자증권·다올투자증권 등 증권사와 우리은행·NH농협은행·수협은행 등도 희망퇴직을 받았다. 올해 5대 시중은행에서만 2400여 명이 희망퇴직으로 회사를 떠날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그렇다고 신규 채용 규모가 유지되는 것도 아니다. 대기업들은 지난 5월 윤석열 정부 출범에 맞춰 고용 확대를 약속했다. 삼성(8만 명), SK(5만 명), 현대차(3만 명) 등 10대 그룹이 약속한 신규 채용 규모만 38만 명이 넘는다. 실제로 올해 채용은 예년에 비해 크게 늘었다. 하지만 경기 하락과 실적 악화로 내년에도 같은 규모를 유지하긴 어려울 전망이다.

하지만 어느 대기업도 “내년 신규 채용을 줄이겠다”고 말하지 못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내년 상반기 경기가 더 악화할 것이 뻔한 상황에서 기업은 비용을 줄일 수밖에 없다. 정부도 올해만큼 고용을 늘리기 어렵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5/00032480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