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2. 16:25

2023년 새해 연초에 읽는 책

 

<소년> 잡지 권두시의 비밀

태백아 우리 님아,

나 간다고 슬퍼마라.

나는 간다.

가기는 간다마는,

나의 가슴에 품긴 이상의 광명은

영겁무궁까지도 네가 그의 표상이로다.

이별을 노래한 시다. 우리 님 `태백`에게 석별의 정을 전하고 있다. 부득이 헤어져야 하지만 임을 향한 사랑은 변함이 없다. 그러기는커녕 더욱 타오른다고 말한다. 최상급의 수사를 사용하여 속마음을 표현했다. 끝없이 영원토록 당신은 나의 님이라고 토로하고 있다.

잡지 <소년> 1910년 4월호에 실린 권두시의 한 구절이다. 1908년 11월부터 1911년 5월까지 통권 23호를 발행했던, 한국 최초의 근대적 종합잡지로 이름 높은 바로 그 언론매체다. 이 잡지는 만 18세에 불과했던 `최남선`이 거의 혼자 발행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일본 유학을 그만두고 중도에 귀국한 그는 큰 목표를 세웠다. 한국의 시대정신을 하나로 통일하는 것이었다. <소년> 발행은 이를 위한 수단이었다. 그는 근대 지식에 관한 교과서를 젊은이들에게 공급하는 방법을 통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서구 문학을 비롯하여 세계의 지리와 역사, 철학과 과학에 관한 기사, 번역, 번안 작품이 <소년> 잡지에 실린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무장투쟁 포함, 해외 독립운동의 큰 그림

1910년에 접어들었다. 망국의 그림자가 다가왔다.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해가는 양상이 뚜렷했다. 이를 저지하려던 비장한 시도들은 유혈의 탄압속에서 시들어갔다. 한때 전국을 내란 상태로 몰고 갔던 의병투쟁은 내리막길에 들어섰다. 애국계몽운동도 총칼의 탄압 앞에서 무력했다. 일본군 헌병대는 항일운동에 나설 가능성이 있는 인물들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가해왔다.

특히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 사건 이후에 더욱 그러했다. 무차별적인 체포, 구금, 구속이 자행되고 있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해 3월경이었다. 신민회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인사들은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망명이었다. 집단적으로 해외나 나가 후일을 도모하기로 합의했다. 어떻게 강력한 일본을 물리칠 수 있단 말인가? 망명을 결심한 사람들은 잘 짜여진 정교한 독립운동 계획안을 고안했다.

먼저 일본에 적대하는 서구열강의 외교적 후원을 받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염두에 둔 강국은 바로 러시아와 독일이었다. 러시아는 러일전쟁 패배 이후 절치부심 복수를 염원하고 있었다. 또 남서 태평양의 마샬제도와 중국 교주만에 교두바를 마련한 독일은 아시아, 태평양 일대의 세력권 확장을 위해 일본과 긴장관계에 놓여있었다. 시운이 맞아 굴러간다면 이들이 한국 독립의 우방이 될 수 있었다.

다음으로 근거지를 마련하기로 했다. 만주 밀산현에 농경지를 구매하여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는 한편, 무장투쟁 간부를 양성할 무관학교를 설립하고자 했다. 유사시에 일본이 러시아나 독일과 전쟁 상태에 처하게 되면 국내에 진공하게 될 무장부대의 군사 간부를 양성한다는 복안이었다. 또 있었다.

해외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조직화하기로 했다. 북간도, 연해주, 미국 등지에 거주하는 한인 이주민 수십만 명을 `대한인국민회`라는 단일한 조직으로 결속하는 일이었다. 그뿐인가. 독립운동을 선도하는 언론매체도 발행하기로 했다. 제대로 된 항일 언론은 국내에서는 경영하기 어려웠다. 망명을 결심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이 계획안을 실행에 옮기려면 자금이 필요했다. 다행히 그 문제도 해겼됐다. 큰 부자인 이종호, 이종만 형제가 대농장 경영 자금은 출자하기로 약속했다. 망명자들은 중국 산둥반도에 위치한 칭다오에서 집결하기로 했다. 독일의 조차지였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모여 망명 이후의 뒷일을 도모하기로 약속했다.

그리하여 그해 3~4월에 국내에서 활동하던 반일운동가들이 하나둘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무관학교 운영을 책임지기로 한 이갑, 유동열, 김희선 등 대한제국의 장교들, 언론매체 발간과 무관학교 정신교육을 담당할 저명한 저널리스트 신채호, 거액의 운동자금을 출자하게될 이종호 형제, 농경지 구매와 농장 경영을 담당할 김지간, 해외 국민회운동의 지도자 안창호와 이강 등이 그들이었다.

이 명단은 이강이 뒷날 저술한 회고록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그 외에도 망명자들이 더 있었다. 보성전문학교 졸업생 김립이 대표적이다. 행적을 추적해보면 김립도 신민회 망명 간부들과 보조를 같이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1910년 3월 9일 서울에서 열린 보성전문학교 제3회 졸업생 다과회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졸업생을 대표하여 개회취지를 설명했다고 한다.

그런데 불과 한 달 뒤에는 블라디보스토크의 한 집회에 얼굴을 내밀고 있다. 4월 4일에 블라디보스토크 한민학교에서 열린 안중근 의사 추도회에 참석하여 통분에 찬 연설을 한 것이다. 이는 김립도 신민회 요인들의 집단 망명 행렬에 참가한 사람 중 한 명이었음을 말해준다. 이로 미뤄보면 망명자 대일 중에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인물이 여럿 있었던 듯하다.

서간도에 농장, 무관학교 설립 추진

신민회 인사들의 집단 망명은 그 뒤로도 이어졌다. 나라가 망한 뒤인 1910년 12월 ,신민회 인사들의 국외 망명이 또 한 차례 집단적으로 조직됐다. 이번에는 압록강 건너 서간도가 근거지로 정해졌다. 농경지 구입과 무관학교 설립을 위해 75만 원을 모금할 계획을 세웠다. 정부기관 장예원의 주사 월급이 15원이고, 사립학교 교원 월급이 25원 하던 때였다.

오늘날 구매력으로 환산하면 대략 1,000억 원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양기탁, 이동녕, 이시영, 안태국, 이승훈, 김구, 김도희, 주진수 등이 이 논의에 참여했다. 언론과 교육을 통해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던 유력한 반일 인사들이었다. 망명 계획은 극비리에 이뤄졌다. 심지어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예를 들면 양기탁은 자신의 망명 의도를 친동생인 양인탁에게도 비밀에 부쳤다. 국외로 출발하기 직전에야 귀띰할 작정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출발을 앞두고 사고가 터졌다. 독립군 자금을 모으기 위해 비밀리에 잠행하던 안명근이 불행히 체포되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국외 망명을 기도하던 신민회 인산들이 속속 검거되기 시작했다.

사안이 매우 급박했다. 검거 선풍 속에서 망명을 결행해야만 했다. 이회영, 이시영 6형제와 이동녕이 건너갔다. 뒤따라 이상룡, 김동삼, 김대락, 김형식 부자 등도 망명에 성공했다. 가산도 처분한 채 온 가족을 이끌고 나선 비장한 망명길이었다. 서간도에 살던 토착 중국인들이 그 행렬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짐을 실은 수레가 줄을 이어 계속되는 것을 보고서는 한국의 황실 인사가 망명하는 것 아니냐는 소문까지 돌았다. <소년> 잡지 권두시는 바로 신민회 망명자들의 심정을 노래한 것이었다. 잡지 편집자가 극비리에 이뤄진 망명 계획의 내막을 전해 들었음이 틀림었다. 기약없이 망명길에 오르는 동지들을 바라보는 젊은 최남선의 가슴 속에서는 격정과 비애감이 끓어올랐다. 그는 망명자들을 축복하는 두 편의 시를 썼다.

<나라를 떠나는 슬픔>과 <태백의 님을 이별함>이 그것이다. 의도가 노출된다면 위험할 수도 있는 행위였지만, 망명자들의 용기를 기리지 않을 수 없었다. 태백은 조국을 가리키는 은유였다. 지금은 비록 이지러진 달처럼 조락하고 있지만, 시운이 닿으면 다시 둥근 보람들로 떠오르게 될 조국이었다.

피억압 민족에게 그것은 평화와 정의의 표상이었다. "세계 평화의 옹호자, 우리 강토의 정수, 우리 역사의 체화, 우리 민족 이상의 결정, 모든 옳음의 활동력의 원천"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권두시는 미래에 대한 낙관으로 끝맺고 있다.

잘 있거라, 나는 간다.

봄은 오느니라.

제왕의 권력과 재화의 세력 밖에 있는

동군(東君, 태양신)은 때만 되면 오느니라.

무궁화 다시 피건 또 다시나 만나자.

책을 읽으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 '일제의 돈 15만원을 갖고 튀어라!'

지금 현재 돈으로 환산하면 대략 150억원에 해당하는 실로 엄청난 거금.

 

독립운동 열전 1 - 잊힌 사건을 찾아서

《독립운동 열전》을 펴내면서 1장 망명 01_《소년》 잡지 권두시의 비밀 02_《압록강은 흐른다》의 저자 이미륵의 망명길 03_상하이 망명객들의 삶―심훈의 소설 《동방의 애인》 2장 김립 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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