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2. 14. 00:22

박정희, '독도밀약' 숨기려 '독도수호운동'하면 고문까지...

'독도를 우리땅이라고 떠들지 말라' 손을 분지르고, ‘독도는 우리 땅’ 노래는 금지곡으로...

역사적으로 독도를 지킨 건 국가가 아니라 민간인이었다. 조선조 울릉도와 독도에서 왜구를 내쫓은 건 민간인 안용복이었다. 1953년부터 56년까지는 경찰병력이나 정부가 독도를 수호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울릉도 주민이 자체적으로 수비대를 조직해서 독도를 지켰다. 

▲1959년 경향신문  보도     © 서울의소리

▲ 故  홍순칠 독도수비대장

홍순칠 독도수비대장은 전쟁을 틈타 독도를 제집 드나들듯 하던 일본인들을 몰아내기 위해 의용수비대를 조직했다. 정부 지원도 없어, 가산을 처분하고 의연금을 모아 기관총·박격포 등을 구입하고 의용대도 모집했다.

독도수비대는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함정의 침범을 두 차례나 격퇴하고, 가짜 해안포를 설치해 일본 함정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기지도 발휘했다. 수비대에서 물러난 뒤에도 1969년, 1972년 독도개발계획서를 경상남도에 제출하는 등 실효적 지배를 강화하도록 재촉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1965년 한일협정 이후 독도밀약을 감추기위해 독도 수호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잡아 고문하여 독도관련 운동을 금지시켰다. 1974년 12월 박정희 유신정권은 홍순칠 독도수비대장을 중앙정보부에 끌어다가 고문했다. 다시는 독도를 우리땅이라고 떠들고 다니지 말라고 협박하며, 오른손으로 독도에 관해 글을 썼기 때문에 다시는 글을 못쓰도록 만들겠다고 오른손을 부러뜨렸다.

전두환의 신군부에서도 똑같았다. 신군부는 1980년대 초 그가 독도 지킴이로 북한 방송에 소개되자, 그를 즉각 체포해 극렬한 고문을 가하여 간첩 조작을 하려 했다. 결국 고문 후유증으로 홍 대장은 1986년 숨졌다. 전두환 정권은 독도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민간인 출입을 막았고, 심지어 노래 ‘독도는 우리 땅’을 금지곡으로 지정했다.

▲위) 탑골공원에 설치했다가 아래) 종로 뒷길 인도로 옮겼으나 지금은 철거된 홍순칠 독도수비대장 동상     © 서울의소리

노무현 대통령의 독도관련 대일담화는 1954년도 변영태 외무장관 성명 수준으로 우리의 입장을 원위치시킨 것이다. 그 전후로 정통성 없는 박정희, 전두환 군사정권과 이명박 정권이 일본 눈치보기 외교로 침묵하고 있을 때 일본은 독도 침탈 야욕을 키웠다. 독도밀약은 1965년 1월11일 서울 성북동 박건석 범양상선 회장의 홈바에서 정일권 국무총리와 일본 자민당의 실력자 우노 소스케 의원이 하나의 메모에 사인을 했다. `미해결의 해결`이란 원칙에 따라 성안된 다음과 같은 내용의 독도밀약이었다.

첫째, 독도는 앞으로 대한민국과 일본 모두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반박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둘째, 어업구역을 설정할 경우 양국 모두 독도를 기점으로 획정하되, 중복되는 부분은 공동수역으로 한다.

셋째, 현재 대한민국이 ‘점거’한 현상을 유지한다. 그러나 경비원을 증강하거나 새로운 시설을 증축은 하지 않는다.(노 다니엘 저 <독도밀약>) 결국 미해결 상태를 해결로 간주하고, 독도 언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도밀약은 다음 날 박정희에게 재가를 받았으며 이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한 인물은 김종필 전 총리의 친형 당시 한일은행 전무인 김종락인 것으로 알려졌다.  고노 이치로등 당시 독도밀약 과정에 참여한 일본 정치인들은 독도밀약을 맺었다고 증언하였으나 현재, 일본정부는 독도밀약을 부인하며 비밀리에 영유권 관련 밀약을 맺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불가능 하다고 밝혔다.

민족문화연구소가 공개한 미 중앙정보국(CIA) 특별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박정희 정권은 군사쿠데타를 한 1961부터 한일협정을 체결한 65년 사이 5년간에 걸쳐 6개의 일본 기업들로부터 집권여당인 민주공화당 총예산의 2/3에 해당하는 6,600만 달러를 제공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밖에도 일본에 쌀을 수출하는 과정에서 김종필이 재일 한국기업으로부터 돈을 받았다.

신군부 등장 이후 밀약문서를 없앴다. 노대니얼 박사는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된 이후 전두환 씨가 정국을 주도하기 시작하면서 시끄러운 문제가 될 것 같아 사본 하나 없는 독도밀약 문건을 태워 버렸다”면서 ”거기에는 서울과 도쿄를 오가는 비행기 안에서 쉬지 않고 정서한 기록들도 포함돼 있어 안타깝다”고 실토했다.

군사독재 정권이나 보수정권이 가장 거론을 기피했던 문제는 희한하게도 독도였다.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릴 때면 일쑤 들고나와, 반일감정을 자극해 국면을 전환시키곤 했지만, 이들의 기본적인 태도는 무관심이었다. 이걸 모르고, 정치적 퍼포먼스에 말렸다가 선의의 피해를 본 경우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게 홍순칠 독도의용수비대 대장이다.

그 시절에는 이 젊은이들도 고문대상이었다.

출처 - http://www.amn.kr/sub_read.html?uid=7211&section=sc1&section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