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5. 6. 14:11

곽병찬 대기자가 박근혜에게 보내는 편지

‘왜 대통령 퇴진을 말하지 않느냐?’는 독자의 전화
헌법 파괴 이어 세월호 참사까지 이유는 충분하니… 

“이렇게 말해도 되는건지 모르겠지만, 저는 한겨레 주주이고 독자이고, 고교생 딸아이도 열렬 독자여서 하는 말인데….” 전화선 저쪽의 독자는 주저주저하며 말을 이어갔습니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나온 말은 이랬습니다. “왜 <한겨레>는 대통령 하야, 아니 대통령의 퇴진을 말하지 않는 거죠?” 한동안 말한 이도, 저도 말이 없었습니다...

잠시 후 말이 이어졌습니다. “이 정도면 알아서 물러나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건 제 이야기 이전에 제 딸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아~, 예, 예.’ 이렇게 얼버무리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제가 난처해하는 줄 알고는 독자는 수고하시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습니다.

한동안 머릿속이 복잡했습니다. 지난 한 해는 국정원과 국방부 등 비밀요원들의 조직적인 여론공작 문제로 날이 새고 밤이 샜습니다. 국정원의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는 국가기관의 이런 헌법 파괴와 대선 공작을 덮기 위한 또다른 공작이었습니다. 공작 책임자를 기소한 현직 검찰총장에 대한 사찰과 퇴진 공작도 이어졌습니다.

그 와중에 간첩 조작 사건까지 발생했습니다. 국정원이 증거를 조작한 사실이 탄로나면서 당사자인 유우성씨는 항소심에서도 무죄 선고를 받았고, 공작을 한 자들은 기소됐습니다. 이 사건 역시 대선 공작 물타기용 공작이자, 현직 서울시장 낙선을 위한 공작이었을 겁니다. 간첩 증거 조작에는 검찰까지 연루됐으니, 최고의 권력기관이 동원된 셈이었습니다.

이쯤만 해도 사실 하야 혹은 퇴진 문제를 거론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건을 기억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노 대통령은 2004년 2월, 총선을 2개월 앞두고,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해줄 것을 기대한다고 말한 게 고작이었습니다.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싶다고 덧붙였죠. 그때 당신이 몸담고 있던 새누리당은, 지금 당신의 비서실장을 맡고 있는 김기춘 의원 등의 이름으로 탄핵안을 발의했습니다. 불과 10여년 전 일입니다.

사실 저는 <한겨레>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다만 민주국가 시민의 권리로써 말할 수 있는 제 의견은 이렇습니다. 헌정 질서를 문란케 하는 정보기관의 공작 속에서 출범했고, 또 지금까지 벌어진 일이라곤 은폐를 위한 공작이나 검찰총장 사찰, 선거 때 국민과 한 약속의 파기 그리고 미증유의 인명 사고 등이었으니, 퇴진을 요구할 수 있는 이유는 충분합니다. 출발이 부정했고, 국민의 생명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고, 여전히 국가와 국민 위에 군림하려고만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도올 김용옥 선생은 지면을 통해 대통령의 하야를 공개리에 주장했더군요.

그러나 저를 주저하게 하는 건 세월호 희생자와 유가족에게 끼칠 영향 때문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데 무능하고 무책임했으며, 재앙 이후엔 회피하기에 급급했던 이 정권은 어떻게든 국민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싶어했습니다. 300명 이상의 인명 피해가 나도록 수수방관했던 이들은 사고가 나자마자 계속 북한의 핵실험 가능성을 흘렸습니다. 마치 북한이 핵실험하기를 바라기라도 하는 것처럼 설익은 첩보를 제기하며,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려 했습니다.

이들에게 최고의 관심사는 희생자와 유가족의 슬픔을 빨리 지우고, 이 정권의 무책임에 대한 비판 여론이 누그러지는 것입니다. 천안함 때는 어떻게든 ‘관제 기억’을 주입하려고 별의별 수단을 다 썼던 이들이, 지금은 분향소 설치도 제한하고, 장례와 분향에 대한 지원도 제한하고, 추모 행사도 위축시키기 위해 기를 쓰는 등 세월호의 기억을 말소시키기 위해 안달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북한의 핵실험 등 도발 이외에 기대를 걸 수 있는 건, 아마도 세월호 재앙을 정치화시키는 것일 겝니다. 지난해 대선 공작을 놓고 대선 불복이냐며 물타기를 하는 한편 지지세력 결집에 나섰던 것처럼, 이번에도 퇴진 논란을 통해 이 문제를 정치쟁점화하는 것입니다. 정치쟁점 곧 정쟁으로 변질되면 최소한 양비론의 방패 뒤에 숨을 수 있고, 맹목적인 지지자들의 광기를 끌어낼 수 있습니다.

이미 ‘박사모’는 박 대통령을 구하기 위한 전쟁을 독려하고 있습니다. ‘7만 박사모가 뭉치고 단결해 음해세력을 척결하고 좌빨을 분리수거하자’는 것입니다. 박정희의 사위, 박근혜 대통령의 동생 남편은 추모의 상장인 ‘노란 리본’의 배후를 수사하라고 촉구했습니다. 이들은 벌써부터 유가족을 욕보이고 빈정거리는 등 도발을 유도해왔습니다.

권력에 눈먼 패륜의 광기에 휩쓸려선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정쟁이 두려운 게 아니라, 온전히 희생자와 유가족의 아픔에 동참하고, 위로하고, 반성하는 데 바쳐져야 할 시간들이 싸움으로 흘러가선 안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살아남은 이들이 그분들에게 바쳐야 할 속죄의 시간입니다. 그런 반성과 참회 없이는 또 이런 재앙이 재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허튼짓에 휘말려 좀비 떼들을 불러내고, 희생자와 유가족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굳이 이 자리에서 하는 까닭은, 당신은 여전히 이런 국민의 바람을 무시하거나 염원에 대해 무지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말을 들어보면, 당신은 여전히 당신 자신을 국가로 여기고 있습니다. 지난달 29일 국무회의에서 ‘국가 개조론’을 들고나왔습니다. “내각 전체가 원점에서 ‘국가 개조’를 한다는 자세로…, 현재 만들고 있는 안전 마스터플랜도 국가 개조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초등학생들도 알듯이 국가는 국민과 영토와 주권으로 이루어집니다. 정부는 입법부와 사법부와 함께 국민으로부터 위임을 받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영토를 수호하며 주권을 지킵니다. 국민의 권력을 위임받은 조직이지, 초월적 위치에서 국민과 국가를 주물럭거리는 조직이 아닙니다. 이번 사건은 위임받은 자들의 무능, 무책임, 농간과 관행에서 비롯됐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이런 정부의 잘못을 국가의 잘못으로 떠넘겼습니다.

국가의 잘못이란 곧 국민의 잘못입니다. 국가 개조란 국민 개조를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부친인 박정희씨가 일쑤 써먹던 게 ‘국가 개조론’이었습니다. 그때 부친은 스스로를 종교적 메시아의 자리에 놓았습니다. 그런데 당신도, 정부의 무능으로 빚어진 참사 앞에서 구원의 메시아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은 국가 운운할 게 아니라, 이 정부를 개조할 때입니다. 퇴진할 각오로 이 정권을 근본부터 바꿔야 할 때입니다.

엊그제는 종교계 지도자들을 앉혀놓고, 그런 의식의 연장선에서 기이한 이야기를 했더군요. 요컨대 ‘국가 개조 차원의 대안을 가지고 국민에게 사과를 하겠다!’ 알고서 말하는 건지 써주는 대로 읽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사과는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고 용서를 비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반성의 연장에서 나오는 게 대안입니다.

어떻게 말을 마차 뒤에 묶고 달리자고 하십니까. 게다가 유언비어가 유가족에게 상처를 주고 혼란을 일으켜 가슴 아프다고요? 유가족이 어떤 유언비어에 그렇게 큰 상처를 입었는지 말씀해보십시오. 그들에게 상처를 입힌 건 당신과 이 정부입니다. 그런데도 종교 지도자라는 분들을 소품처럼 앉혀놓고, 국민을 훈계하고, 메시아 같은 모습을 보이니 그저 참담할 따름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바꿔야 할 것은 이 정부이고, 개조해야 할 것은 이 정권입니다. 함부로 국가 개조를 입에 담지 마십시오. 당신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 국민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그들이 우리에게 위임했다. 그들은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나치의 선동꾼 요제프 괴벨스의 말입니다.

한겨레 신문 곽병찬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