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7. 23. 19:57

실존인물 `백동수`와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세상의 모든 무공들보다 더 강한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감정`이다. 특히 `사랑`... 주성치 주연의 영화 `쿵푸 허슬`에서 돼지촌의 주인 부부가 무공을 폐하고 은둔했던 것도 슬픈 감정 때문이요,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에서 밝혀진 마지막 히든 카드 또한 사랑의 감정이었다. 원작 만화 `야뇌 백동수`를 보지 않았기에 드라마가 얼마만큼 원작에 충실한지는 알 수 없지만 주연 아역 배우들이 성장한 시점에서 그들의 사부격인 등장인물들 간에 얽혀있는 애증의 관계가 드러났다.

드라마 `추노` 이후 꽤 볼만한 무협사극이 될런지 인터넷에서 여러 호평들이 나오고 있는데 시대적인 배경외 실존인물이라는 주인공과 함께 `무예도보통지`에 관한 관심들도 많이 보이고 있다. 추노에서도 대나무 숲 검술대결 씬에서 `본국검보(本國劍譜)`에 관한 언급과 내용이 잠시 나온 적이 있었다. 

여기서 백동수라는 역사적인 인물에 대해 살펴보자면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증조할아버지 백시구가 1721년 신임사화에 연루돼 억울하게 옥사했지만, 영조가 즉위하면서 복권시켜 호조판서를 추서하고 시호까지 내려 백동수 집안은 충직한 무인의 후예로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나중에 정조의 명으로 박제가, 이덕무 등과 함께 무예도보통지 편찬을 맡게 된다. 이로써 드라마에 나왔던 몇 가지 왜곡을 발견하게 된다.

그 하나는 백동수의 아버지 백사굉은 역모죄로 처형된 것이 아니고 출산 이후 어머니가 죽지도 않았으며 더군다나 사지의 뼈가 뒤틀린 기형으로 태어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갓난아이 때 팽형으로 기름이 끓는 가마솥에 던져질 뻔한 것도 사실이 아니라고 하니 이 드라마 무사 백동수도 역사왜곡의 대열에 합류를 하고야만 것이다. 

팽형이라는 것은 조선시대때 특히 뇌물을 받은 탐관오리를 처벌하는 형벌로 실제 기름은 끓지 않고 비어있는 가마솥에 잠시 들어갔다 나오는 것이 전부다. 하지만 그 이후에 해당 가족들은 곡을 하고 장례를 치르며 더 이상 살아 있는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아 평생을 투명 인간으로 지내야 하기에 어찌 보면 아주 가혹할 만큼 무서운 형벌이다. 바로 오늘날 부활하면 좋을 조선시대의 형벌 1순위가 아닐까 생각한다.

주인공 백동수 외 관심이 가는 또 한 명의 등장인물은 아마도 `검선`이라는 칭호가 붙는 `김광택`이 아닐까 싶은데 이 또한 전해지는 이야기를 잠시 살펴 보자. 다음은 유본학이 쓴 `김광택 전`의 일부이다.

김광택은 서울 사람으로 아버지 체건은 느슨함을 싫어하는 인물이었다. 숙종때에 훈련도감의 무예를 수련함에 더하여 칼 쓰는 법으로는 섬나라 오랑캐만 한 것이 없기에 군졸로 하여금 (왜검을) 익히게 하려 하였다. 그러나, 왜의 비밀이라 하여 배울 수가 없었던 바. 체건은 자원하여 그 기법을 얻고자 왜관으로 몰래 들어가 노비가 되었다.

왜에는 신검술이 있었는데 그 또한 비밀이라 하여, (체건이) 이웃나라 사람이어도 보고 얻을 수가 없었다. 체건은 그 서로 겨루는 것을 엿보고, 바로 땅속에 움을 파고 숨어 엿보고 따라하였다. 수년이 지나 드디어 왜의 기술을 다하여 더 배울 것이 없었다. 임금님(숙종) 앞에서 시범을 보였는데, 환상인 듯하여 사람들을 끝없이 놀라게 하였다.

또한, 재를 땅에 뿌려놓고 맨발로 양쪽 엄지발가락을 이용하여 재를 밟았고, 그리고 나는 듯한 칼춤은 춤의 경지에 이르러, 재에는 발자국이 남지 않으니, 그 몸의 가볍기가 이와 같았다. 임금이 그를 기특하게 여겨 훈련도감의 교사에 임명하였다. 오늘날 모든 영에서 병사들이 하는 왜도는 체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광택은 태어날때부터 남다른 데가 있었다. 김신선을 따랐는데 그는 더 이상 말할 것이없는 자이다. 각식과 경신의 술법을 배웠다. 서울에서 풍악(금강산)까지 400리를 가는데 김신선은 짚신 한 켤레로 3번을 왕복해도 신이 닳지 않았다. 광택 또한 짚신 한 켤레로 두 번을 오고가도 닳지 않았다. 능히 태식을 하며 겨울철에도 옷 한겹으로 지냈다.

칠십 팔 세에 체건이 하루는 문을 밀고 텅빈 관사에 가서 붓을 물에 담그어 관청위의 현판을 베껴 쓰니, 큰 글씨는 예스럽고 아름다웠으며 사랑할만 하였다. 검무는 신의 경지에 이르러, 만지낙화세를 하면 몸이 감춰져 보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나이 80에도 얼굴이 어린아이 같았으며, 죽는 날에야 사람들은 시해(죽음에 이르러 신선이 됨과 동시에 시신이 사라지는 도가의 수행법)한 것임을 알았다. 관직은 첨사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에 많은 검은 옷을 입은 무리가 있지만, 적은 도가(道家) 계열 중에 -검은 옷을 입은 무리는 많고 도가를 따르는 무리는 적으니- 수련으로 이름을 얻은 자는 오직 김신선 한 명으로 세상에서 모두 그를 일컬었다. 그러나, 오히려 광택이 있는 것은 알지 못했다.  체건은 능히 검의 기술을 얻어 충성으로 나라에 봉사하니, 마땅히 그 재주를 사용하였다면, 곧바로 변방을 안위케 하여 공을 세웠을 것이다. 광택 또한 능히 그 부친의 기이한 술법을 전해 받았으니 또한 다르다 하겠는가? 역시 이는 검으로 신선의 경지에 오른 것이 아닌가?

판관 득용이 기이한 선비를 좋아하여, 광택과 더불어 서로 알고 지내며 일찍이 그 일을 이야기하니, 고로 그것을 기록하였다. 무릇 위항인 (비양반층의 지식인전반을 통칭하는 말) 들은 기이한 재주가 있고 남다른 데가 있어도, 민몰하여 전하는 것이 없으니 또한 얼마나 한스러운지, 이런 것이 어찌 체건과 광택뿐이겠는가? 너무나 애석하고 아쉬운 것이다.....

백동수(1743~1816)는 실존인물이다. 정조의 명으로 무예교본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한 무인이기도 하다. 이 책은 한중일 삼국의 무예를 우리 실정에 맞게 체계화한 조선 무예의 완성이자 동양 무예의 보고다. 백동수는 무예의 최고 고수일 뿐 아니라 당대의 지성인 북학파 실학자 이덕무, 박제가, 박지원 등의 벗이었다. 이덕무의 처남이라는 얘기도 있다. 

이덕무가 자기 글에 대한 평을 부탁할 만큼 문무를 겸비했고, <무예도보통지>는 백동수와 당시 규장각 검서관이던 두 벗, 이덕무 박제가의 우정의 결실이기도 하다. 백동수가 총괄하고, 이덕무가 문헌을 고증하고, 박제가가 본문 글씨를 썼다. 조선왕조실록에 백동수 기록은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했다는 한 줄뿐이지만, 벗들과 당대 문인들이 남긴 글에서 그의 풍모를 알 수 있다.

그는 정조가 아끼고 박지원과 이덕무가 사랑한 선비였으며, 사라진 전통무예의 맥을 되살린 무예가이다. 숙종 때 검선(劍仙)이라 불리던 김광택에게 조선검법을 전수 받는 한편, 태식으로 내공을 쌓고 의술까지 익혔다. 청년시절에는 학문보다 무술연마에 깊이 빠져들어 주위의 우려를 사기도 했다. 그의 주위에는 박제가, 이덕무, 김홍도와 같은 좋은 친구들이 있었다. 중년에는 학문에 뜻을 두어 박지원과 같은 대학자들로부터 '무(武)로써 문(文)을 일궜다'는 평가를 받았다.

1771년 식년무과에 당당히 합격했으나 관직 수가 부족해 벼슬을 얻지 못하자 미련 없이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부모님을 모시고 강원도 산골에 들어가 10여년 동안 농삿일을 하면서 무예를 연마하며 보냈다. 이후 정조가 즉위하고 친위군영인 장용영을 조직하면서 서얼 무사들을 등용할 때 그는 창검의 일인자로 추천받았고, 1788년 마흔 다섯에 장용영 초관에 임명되었다.

 초관은 100여명의 부하를 거느린 종9품 무관이었다.  이듬해 가을부터 무예서 간행작업에 착수하여 1790년(정조 14년) 4월 29일, 마침내 무기술 18기에 마상무예 6가지를 더해 24반 무예를 수록한 '무예도보통지'가 완성되었다. 이 책은 중앙 군영은 물론 팔도의 군영에 보급되어 군사훈련의 교범으로 활용되었다.

박제가가 쓴 글에 따르면, 백동수는 "말 달리고 활 쏘고 검을 쓰며 주먹을 뽐내는 부류, 글씨와 그림, 인장, 바둑, 거문고와 비파, 의술, 지리, 방기(方技)의 무리부터 저잣거리의 교두꾼, 농부, 어부, 백정, 장사치 같은 천인에 이르기까지 길거리에 나서서 도타운 정을 나누지 않는 날이 없었다." 

사귐에 차별이 없었던 것은 서얼 출신(할아버지 백상화가 서자였다)으로서 방외인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경서와 사기(史記)를 능히 논할 만했고"(박제가), "무(武)로써 문(文)을 이루었으며"(성대중) "예서와 전서에 뛰어났고"(박지원), "다시 못 볼 기남자(寄男子)"(성해응)였다라고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