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그래픽 무브먼트 우주(Holographic Universe)
... "감추어진 질서는 많은 미세한 차원들을 가지고 있다. 만일 우리의 주의가 그 미세한 차원에 미칠 수 있다면 우리는 일상적으로 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사실상 '그 어떤' 장의 정체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봄이 말했던 것처럼, "전기장이란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모른다." 새로운 종류의 장을 발견하면 그것은 신비롭게 보인다 ...
관측 가능한 보이는 우주 너머 그 이면의 우주는 어떤 원리로 이루어져 있을까. 그리고, 그러한 세계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만약 그러한 세계가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알기 위해 가능한 모든 상상력과 수단을 동원할 필요가 있고, 과학도 그 중 하나다. 하지만, 이 과학이라는 분야도 오늘날 일종의 `확률`적인 도구라는 면모를 보이면서 규명하지 못하는 사실들도 많으며 급기야 한계에 봉착했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또한 종교에서 드러난 폐단과 같이 여기에도 교조주의적 권위와 자존심 문제가 적지 않게 도사리고 있다. 인간들은 어쩔 수 없나보다.
`시멘트`라는 것은 그냥 공구리가 아니라 집이나 건축물을 지을때 모래와 자갈 등의 재료들 사이를 메워주는 일종의 접착제 구실을 하는 것으로 금속 재료공학에서도 초경합금을 만들때에는 `텅스텐`이 이런 역할을 한다.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이 책이 바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런 역할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스티븐 호킹의 저서 `호두껍질 속의 우주`를 읽어보면 이 우주는 어쩌면 하나의 거대한 홀로그램이고, 우리가 보고 느끼고 체험하는 모든 것은 그 홀로그램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어느 쪽이 실재와 허상인지를 알기가 어렵다는 내용이 있다. 그렇게 보면 우리의 뇌는 그러한 홀로그램 우주를 감지하는 하나의 수신기이자 해독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이 책에서 말하듯이 외부에 있는 세계는 사실 공명하는 거대한 파동형체(wave forms)들이고, 오직 우리의 감각 속으로 들어온 이후에야 우리의 뇌에 의해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세계로 변환되는 하나의 '주파수 대역'이란 말이 사실이란 것일까..
우리의 우주는 어디에나 `중력`이 작용하지만 이걸 힘이라고 보기보다는 하나의 휘어진 공간 자체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래서 우리 우주 전체를 보면 그것이 하나의 호두껍질처럼 주름이 잡힌 모습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중력 말고도 우주에 존재하는 다른 힘도 있는데 보통 전자기력이라고 하지만 그걸 좀 다른 표현으로 `플라즈마 우주`라고 한다. 즉, 우주의 공간은 플라즈마로 이루어진 필드라는 것이다. 이 플라즈마는 고농도의 전자와 양이온, 즉 양전하를 띤 원자를 품고 있는 가스인데 놀랍게도 전자들이 일단 플라즈마 속에 들어오면 개개의 독립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큰, 상호연결된 전체의 일부가 된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다시 말해 전자의 바다가 마치 '살아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를 했던 버클리 방사선 연구소의 봄은 양자역학자들이 둘러놓은 금단의 벽 너머에 과학이 발견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더 깊은 실재, 즉 아양자(subquantum) 차원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가정했다. 이 아양자 차원에는 새로운 종류의 장이 존재한다고 가정하기만 하면 양자물리학의 현상들을 양자역학의 권위자들에 뒤지지 않게 설명해낼 수 있음을 발견했다. 이러한 새로운 개념의 장을 '양자장(subquantum potential)'이라고 명명했고 그것이 마치 중력장처럼 공간 속에 편재해 있다는 이론을 세웠다. 그러나 중력장이나 전자기장 등과는 달리 이 양자장의 힘은 거리가 멀어져도 약해지지 않았다. 그것의 비국소적 효과는 미세하지만 어느 곳에서나 똑같은 힘으로 작용했다. 만약 이게 맞다면 양자물리학자들이 말하는 빛보다 빠른 동시성의 작용을 뒷받침할 수 있는 훌륭한 가설이론이 된다.
봄은 의식이 좀더 미묘한 형태의 물질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이 둘 간의 모든 관계의 토대는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현실차원이 아니라 감추어진 질서의 깊은 밑바닥에 깔려 있다고 믿는다. 의식은 모든 물질의 다양한 심도의 접힘과 펼쳐짐 속에 존재하며, 그것은 아마도 플라즈마가 어떤 생명체적인 성질을 일정 부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짐작케 한다. 봄은 형체에 활동력을 불어넣는 것은 마음이 지닌 성질의 가장 큰 특징이며 우리는 이미 전자에서 마음과 비슷한 어떤 것을 발견했다고 말하면서 이와 마찬가지로 그는 우주를 생물과 무생물로 나누는 것 또한 무의미한 일로 생물과 무생물은 불가분하게 서로 엮어져 있고 생명 또한 우주라는 총체의 전반에 깃들여 있으며 바위조차도 어떤 의미에서는 살아있다고 보이는데 왜냐하면 생명과 지능은 모든 물질뿐만 아니라 '에너지', '공간', '시간', '전 우주를 이루고 있는 직물', 그리고 우리가 전체로부터 추상해내어 분리된 사물로 오인하는 기타의 모든 것들 속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물리학자 폴 데이비스도 이 '비국소적인' 양자효과야말로 그 어떤 형태의 인과적 상관관계도 있을 수 없는 사건들 사이에 연관성,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상호연결성을 지어준다는 의미에서 참으로 동시성의 일종이라고 했다. 동시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또 다른 물리학자는 F. 데이비드 피트 역시 융이 제시한 형태의 동시성은 실재할 뿐만 아니라 감추어진 질서를 뒷받침하는 증거를 보여준다고 믿는다. 봄의 견해에 의하면 의식과 물질이 외형상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착각이며 만물이 비롯되는 근원인 감추어진 질서 속에서는 마음과 물질 사이에 분리가 없다면, 현실 또한 이 깊은 연결성의 흔적으로 가득 차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피트는 동시성이 실재라는 직물에 생긴 '구멍', 즉 우리로 하여금 자연의 배후에 감춰져 있는 광대하고 수렴적인 질서를 살짝 엿볼 수 있게 하는 찰나적인 틈새라고 본다. 달리 말하자면 동시성 현상은 물리적 세계와 우리 내면의 심리적 현실 간에 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삶에서 동시성을 경험하는 일이 비교적 드물다는 사실은 우리가 의식의 전체 장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정도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마음과 실재의 심층차원의 무한하고 눈부신 잠재력으로부터 우리가 자신을 얼마나 차단시켜놓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의 뇌는 궁극적으로는 다른 차원, 즉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심층적 존재차원으로부터 투영된 그림자인 파동의 주파수를 수학적인 방법으로 해석함으로써 객관적 현실을 지어냈다. 두뇌는 홀로그램 우주 속에 감추어진 홀로그램이다." 이러한 결론이 객관적인 세계란 최소한 우리가 믿게끔 길들여져 있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깨달음을 얻게 했다. '외부에' 있는 것들은 파동과 주파수의 광대한 대양이며, 이 파동과 주파수가 우리에게 현실처럼 느껴지는 것은 단지 우리의 두뇌가 이 홀로그램 필름과 같은 간섭무늬를 이 세계를 이루고 있는 여러가지 물체와 기타 친숙한 대상들로 변환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라는 현실 또한 매우 다른 두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자신을 흔히 공간 속을 움직이는 물리적 객체로 보고 있다. 아니면 우리 자신을 홀로그램 우주 전반에 깃들어 있는 간섭무늬로 볼 수도 있다. 봄은 이 두 번째 시각이 오히려 더 옳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을 홀로그램 우주를 '바라보고' 있는 홀로그램 마음/두뇌라고 생각하는 것 또한 허구화, 즉 본질적으로 불가분한 두 사물을 분리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홀로그램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홀로그램의 일부인 것이다. 즉, '우리는 시간과 공간까지도 지어낸다'는 것이다. 양자물리학의 기본 교의 중 하나는, 우리는 현실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창조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인데 우리가 원자 차원을 넘어 현실의 숨어 있는 깊은 차원으로 파고들수록 현실의 '참여적' 성질은 더욱더 현저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체 에너지 장 속에서 어떤 특정한 구조나 패턴을 발견했다고 섣불리 말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우리가 발견했다는 그것이 사실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홀로그램 모델에 의하면 마음이나 신체는 두뇌가 현실을 '경험'하는데 사용하는 신경 홀로그램과 현실을 '상상'할 때 그려내는 신경 홀로그램 간의 본질적인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다. 이 두 가지가 다 인체에 극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 영향은 면역체계를 바꿔놓고 약효를 없애버리거나 강화시키기도 하며 상처를 놀라운 속도로 치유하고, 암 덩어리를 녹이고 유전자 프로그램을 고쳐놓으며,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방법으로 살아있는 육체를 재성형시켜놓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우주와 그것을 다스리는 물리법칙 또한 이 흐름의 산물이라고 한다면 그것들 또한 습관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분명히 그것은 깊게 베어 있는 습관이다. 물리법칙이란 마치 우리의 습관이나 깊은 확신이 우리의 사고 속에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너무나 큰 관성력을 가지고 고정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육체가 인간의 에너지 장 속의 단지 밀도만 다른 또 하나의 층이며 그 자체가 오라의 간섭무늬로부터 합성된 일종의 홀로그램이라는 생각은 마음이 지닌 놀라운 치유력과 신체 전반에 대한 엄청난 지배력을 설명해줄 수 있다. 질병이 육체에 나타나기 수주일, 심지어 몇 개월 이전에 에너지 장 속에 먼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심령가들은 질병이 사실은 에너지 장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것은 에너지 장은 육체보다 어느 면에서는 더 근원적이어서 육체가 형성될 단서를 주는 일종의 청사진으로 기능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달리 말하자면 에너지 장은 육체가 지니고 있는 감추어진 질서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러한 감추어진 질서 속에서 변화를 만들어내는 데는 변성된 의식상태가 요구될지도 모른다는 견해는 불에 타지 않는 능력이 고도의 신앙과 종교적 헌신과 관련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입증되고 있다. 즉, 우리의 신념이 깊으면 깊을수록, 감정적으로 더 많이 고양되어 있을수록, 우리의 신체나 현실 속에다 일으켜놓을 수 있는 변화는 더 커진다는 것이다.
우주 감추어진 질서와 펼쳐진 질서를 티베트 불교는 두 가지 측면에서 공과 색이라고 부른다. 색은 눈에 보이는 대상의 현실이다. 공은 감추어진 질서와 마찬가지로 우주 삼라만상의 탄생지이며, 그로부터 '무한한 흐름'이 나온다. 그러나 오직 공만이 실재다. 객관적 세계의 모든 형상은 환영이며 이 두 질서 사이의 끊임없는 흐름으로 인하여 존재한다. 그리고 공은 '현묘하고' '보이지 않으며' '겉으로 보이는 성질로부터 자유롭다'. 그것은 이음매 없는 전체이므로 말로써 형용할 수가 없다. 공정하게 말하면, 색조차도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긴 하지만 어쨌든 그 환영과도 같은 성질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한히 광활한 눈에 보이는 우주들의 복합체'를 담고 있다.
힌두교는 실재의 감추어진 차원을 브라흐만이라고 부른다. 브라흐만은 형상이 없지만, 눈에 드러난 현상계의 모든 형상물들의 근원이며, 모든 형상들은 그로부터 비롯되어 나타나고 다시 그 속으로 숨어드는 끊임없는 흐름 속에 있다. 감추어진 질서를 표현만 바꾸면 영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말하는 봄처럼 힌두교도들은 때로 이 실재의 차원을 인격화하여 그것이 순수의식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의식은 단지 물질의 미묘한 형태일 뿐만 아니라 물질보다 더 근본적인 것으로써 힌두 우주관에서는 의식으로부터 난 것이 물질이며, 그 반대가 아니다. 혹은 베다에서 말하듯이, 물질우주는 의식의 '비추고' '가리는' 힘에 의해 존재하게 된다.
물질우주는 가려져 있는 의식의 창조물, 곧 2차 현실이기 때문에 힌두교도들은 그것이 덧없는 미망, 즉 마야라고 말한다. <스바타스바라타 우파니샤드(Svatasvatara Upanishad)>가 말하듯이, "현상계는 미망(마야)이며 브라흐만이 그 미망의 창조자임을 알라. 온 우주는 그의 부분들인 뭇 존재들로 채워져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케나(Kena) 우파니샤드>는 브라흐만이 "인간으로부터 풀잎의 형상에 이르기까지, 순간순간 모습을 바꾸는" 초자연적인 무엇이라고 말한다.
힌두교는 만물이 브라흐만의 신성한 전체성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현상계가 이음매 없는 전체라고 말한다. 그리고 '분리 같은 것은 궁극적으로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지 못하게 훼방하는 것이 '마야'로 일체인 의식을 분화시켜 대상이 나와 차별되어 보이게 하며 또한 우주 속의 삼라만상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게 한다. 그리고 인간의 의식이 가려지거나 수축되어 있는 한 그러한 객관성은 존재하게 된다. 티베트의 탄트라 신비가들은 모든 정신작용이 신비한 에너지에 파문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그들은 온 우주가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며 모든 존재의 집단적 생각이 우주를 움직이고 있다고 믿는다. 마음의 깊은 차원에 접근할 수 있는 숙달된 위대한 요기들은 이러한 힘을 의식적으로 사용할 수 있으며, 이런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그들이 행한 방법 중의 하나는 원하는 창조를 반복적으로 심상화하는 것이었다.
고대 이집트 신화 속의 예언자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는 미묘한 현실차원을 꿰뚫어 보고서 지식의 가장 중요한 열쇠 중 하나는 '안은 밖과 같고 작음은 큼과 같음'을 이해하는 것이라 했는데 이 헤르메스를 수호성자로 여겼던 중세 연금술사들은 이러한 생각을 '위에서 그러하듯이 아래에서도 그러하다'는 금언으로 바꾸어 놓았고, 힌두교의 비스바사라 탄트라는 대우주가 곧 소우주라는 동일한 표현을 "여기 있는 것은 다른 곳에도 있다."라고 했다.
불교의 화엄사상에서도 모든 곳이 거울로 만들어진 방 안의 한 가운데 촛불을 켜고, 수정을 놓고서 `일즉다, 다즉일`을 설명했듯이 이것 또한 그렇게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상호연결성임을 강조했는데 그래서 홀로그래픽 무브먼트라고 하는 것이고, 이미 홀로그램이라는 학설이 나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무수한 종교, 철학적 사상가들은 이 우주의 비국소적 구조를 간파했으며 그러한 통찰을 표현할 각자 나름의 고유한 방식을 찾아냈었다.
'Book과 함께 여유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흐르는 강물처럼 - 파울로 코엘료 (0) | 2014.08.11 |
---|---|
기이하고, 묘한 이야기들 `요재지이` - 포송령 (0) | 2014.08.05 |
여름 휴가철 추천도서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0) | 2014.07.25 |
심각했던 현대사를 유쾌하게 지나온 어느 100세 노인 이야기 (0) | 2014.07.23 |
애거사 크리스티 추리소설, `쥐덫` (0) | 2014.07.14 |
애거사 크리스티 장편 추리소설, ABC 살인사건 (0) | 2014.07.08 |
슬픔이 주는 기쁨 (0) | 2014.06.30 |
오디쎄이아(Odysseia), 그리스어 원전 번역판 (0) | 2014.06.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