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1. 17. 16:19

남을 해하면 안되는 이유. 생명은 하나.

앗시리아 왕 앗사르하든은 라일 나라를 점령하여 도시를 불사르고 주민들을 자기 나라로 잡아갔다. 또 병사들을 모두 죽이고, 장교들은 목을 자르거나 껍질을 벗겼으며, 라일 왕은 잡은 옥에 가두었다. 어느 날 앗사르하든 왕은 잠자리에 누워 라일 왕을 어떤 방법으로 사형에 처할 것인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침상 옆에서 소리가 들려 눈을 떠보니, 흰 턱수염을 길게 기른 한 노인이 서 있었다.

왕은 깜짝 놀라 물었다. "도대체 넌 누구냐? 무엇 때문에 여기 왔느냐?"

"라일 왕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왔다."

"그놈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다. 내일이면 사형에 처해질 놈이니까. 단지 어떤 방법으로 죽일 것인지 그것만이 결정되지 않았을 뿐이다."

"왜 그를 사형에 처하려 하는가? 라일 왕은 바로 네가 아닌가?" 노인은 말했다.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군!"

왕이 화가 나서 말했다.

"나는 나, 라일 왕은 라일 왕일 뿐이다."

"너와 라일은 같은 인간이야."

노인의 말은 칼날처럼 가슴 속을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자신이 라일 왕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네 꿈에 지나지 않아."

"그 무슨 허튼 소리."

왕은 눈을 흘기며 말했다.

"나는 지금 이 침상에 누워있다. 내 주위에서는 순종스런 노예들이 시중을 들고 있다. 그리고 내일도 오늘처럼 친구들과 잔치를 벌일 것이다. 그러나 라일 왕은 마치 조롱 속의 새처럼 감옥에 갇혀있는 몸이다. 그리고 내일이면 혀를 축 내밀고 신음하다 죽게될 것이고, 그 시체를 개들이 뜯어먹게 될 것이다."

"아니, 너는 그의 목숨을 빼앗지 못할 것이다." 노인이 장담했다.

"나는 1만 4천 명의 병졸을 죽여 그 시체로 둑을 쌓았을 정도다. 나는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없다. 이것만 보아도 내가 라일 왕의 목숨을 빼앗기란 식은 죽 먹기보다 쉽다는 증거가 되지 않는가?"

"라일의 병졸들이 이미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학살당했지만, 나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들은 아마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즐겁기만 하다."

"그것은 단지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뿐이다. 너는 자기 자신을 괴롭혔을 뿐이지 절대로 그들을 괴롭힌 것이 아니다."

"무슨 소리인지 도무지 모르겠군."

노인은 물이 가득 든 성수반을 가리켰다. 왕은 일어나서 성수반 가까이로 갔다.

"발가벗고 이 안에 들어가라!"

노인이 말했다.

앗사르하든은 무엇인가 거절할 수 없는 힘에 의해 노인의 말대로 옷을 벗고 성수반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위에서 물을 뿌리기 시작하거든 머리를 물에 담그도록 하라."

노인은 물주전자를 왕의 머리 위로 높이 쳐들었다.

그러자 왕의 머리가 물 속에 잠겼다.

앗사르하든 왕이 물 속에 가라앉자마자 그는 이미 앗사르하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리고 자기 모습이 훌륭한 침대에 누워있는 것이 보이고, 그 옆에는 아름다운 여자도 함께 있었다. 왕은 그 여자를 지금까지 본 일이 없는데도 그녀가 자기 아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여자가 일어나면서 왕에게 말했다.

"여보, 라일. 어제 일로 정말 피곤하셨던가 봐요. 늦잠을 주무셨군요. 그래서 깨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대신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자, 어서 옷을 갈아입고 나가보도록 하세요." 앗사르하든은 이 말을 듣고 자기가 라일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다만 어째서 진작 그것을 깨닫지 못했을까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옷을 갈아입고 대신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나갔다.

대신들은 라일에게 엎드려 절을 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왕인 라일 앞에 앉았다. 그러자 그들 중 가장 원로인 신하가 난폭한 앗사라하든의 횡포에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으니 당장 목숨을 걸고 싸우길 간청했다. 그러나 라일은 동의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신을 앗사르하든 왕에게 보내 항의하도록 하겠다면서 대신들을 돌려보냈다.

그 후 왕은 저명한 인물을 사신으로 임명하여 앗사르하든 왕에게 보냈다. 그 일이 끝난 뒤 라일 왕이라 생각하고 있는 앗사르하든은 사냥을 나갔다. 사냥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궁전에 돌아온 라일은 친구들과 술잔치를 벌이고 노예들의 춤을 보면서 흥에 잠겼다.

이튿날, 궁전으로 나가자 고소인과 재판에 넘겨진 죄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왕은 평소와 다름없이 자신이 처리해야 할 사건에 전념했다. 그 일이 끝나자 왕은 또 사냥을 나갔다. 이번에도 사냥은 성공적이었다. 늙은 암사자를 쏘아죽이고 새끼 두 마리를 사로잡았다. 사냥이 끝난 뒤 또다시 술잔치를 벌이고 음악과 춤을 즐겼다. 그리고 밤에는 사랑하는 아내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는 왕으로서 직무와 쾌락으로 그날 그날을 보내면서 앗사르하든 왕에게 보낸 사신이 돌아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 소식도 없이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마침내 사신이 돌아왔을때 그는 귀와 코가 잘려져 있었다. 앗사르하든 왕이 사신을 통해 라일 왕에게 전한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 라일 왕은 즉시 금은과 노송나무를 조공으로 바쳐라. 또한 앗사르하든 왕에게 정기적으로 문안 인사를 올려라. 만일 이행치 않는다면 라일 왕에게도 사신에게 가한 것과 똑같은 박해를 가하겠다는 것이었다. 라일 왕은 다시 대신들을 소집하여 각자의 의견을 물었다. 대신들은 입을 모아 공격을 당하기 전에 먼저 쳐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은 그 주장을 받아들여 직접 선두에 서서 진격해 들었갔다. 전투는 7일 동안 계속되었다. 왕은 매일같이 말을 타고 다니며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8일째 되던 날 그들의 군대는 넓은 분지에서 앗사르하든의 군대를 만났다. 라일의 군대는 용감하게 싸웠다. 그러나 예전의 앗사르하든이었던 라일은 적군이 분지를 공략하고 자신의 군대를 무찌르면서 마치 개미때처럼 산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라일의 군대는 몇 백 명에 불과한데, 앗사르하든의 군사는 수천에 이르고 있었다. 그리고 라일 자신도 부상을 입어 결국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는 다른 포로들과 같이 앗사르하든 군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9일 동안 걸었다. 10일째 되는 날 니네베에 도착하여 감옥에 갇혔다.

라일은 굶주림과 상처보다는 오히려 치욕과 분노때문에 더 큰 고통을 받았다. 그리고 자신이 받은 고통을 적에게 고스란히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단지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고통을 적에게 보이지 않는 것뿐이었다.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그들이 보고 기뻐하는 꼴은 자기 자신이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일을 당한다 해도 절대로 괴로워하지 않고 사나이답게 참겠다고 결심했다.

왕은 20일 동안 처형될 날만 기다리면서 감옥에서 지냈다. 그는 대신과 친지들이 형장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았다. 라일 왕은 그들의 손발이 잘리고 혹은 산채로 가죽이 벗겨지면서 신음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공포와 불안을 조금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또 사랑하는 아내가 손발이 묶인채 끌려가는 것도 보았다. 자기 아내가 앗사르하든의 노예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는 아무 말도 않은채 참고 견뎠다. 그때 그를 감시하고 있던 한 병사가 말했다.

"이봐 라일, 가련한 신세가 됐군. 너도 한때는 왕이었는데 지금 이 꼬락서니가 뭐냐 말이다!" 라일은 그 말을 듣자 지금까지 잊고 있던 일들의 모두 되살아났다. 그는 도저히 이 시련을 감당해 낼 수 없을 것 같아 창살에 머리를 부딪혀 자살할 생각을 했다. 그러나 자살하기에도 힘이 부족했다. 그는 절망한 나머지 신음하면서 감옥바닥에 쓰러졌다.

마침내 두 병사가 감옥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의 두 팔을 가죽끈으로 묶어 피가 흥건하게 고여있는 형장으로 끌고 갔다. 라일은 핏방울이 떨어지고 있는 형틀을 보았는데, 그것은 조금 전에 그의 대신이 흘린 피였다. 이제 자신이 처형될 차례라는 것을 라일은 깨달았다.

옷이 벗겨졌다. 라일은 늠름하고 우람했던 몸이 이토록 수척해진데 대해 깜짝 놀랐다. 두 병사가 그의 여윈 팔을 붙들고 높이 쳐들어 형틀에 매달려고 했다. '아아, 드디어 죽게 되는구나. 이제 모든 것이 끝장이다!' 라일은 끝까지 침착하려던 결심이 무너져, 마침내는 흐느껴 울면서 살려달라고 간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느 한 사람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나는 분명히 잠들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꿈이다.'

그는 눈을 뜨려고 몸부림쳤다. 그러자 정말 잠에서 깨어났다. 하지만 눈을 뜨고보니 자신은 앗사르하든도 아니고 라일도 아닌 하나의 동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동물이 되어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도 없는 이상한 동물이었다. 동물이 된 왕은 골짜기에서 풀을 뜯거나 꼬리로 파리를 쫓았다. 그리고 그의 곁에서는 다리가 길고 잿빛인 새끼 당나귀가 뛰놀고 있었다. 그 새끼 당나귀는 앗사르하든을 보고 전속력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부드러운 코끝으로 앗사르하든의 배를 비비면서 열심히 젖꼭지를 찾아 쭉쭉 빨아먹기 시작했다.

앗사르하든은 자신이 암당나귀가 되었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놀라지도 않고 쑥스러워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기분이 유쾌했다. 그는 자기 혼자만이 아니라 자자손손에 걸친 기쁨의 감정을 동시에 경험했던 것이다. 이때 갑자기 무언가가 붕 소리를 내며 날아왔다. 그리고 배에 부딪쳤다. 예리한 것이 피부를 뚫고 살에 박혔다. 심한 통증을 느낀 앗사르하든(현재는 당나귀가 되어있는 왕)은 새끼가 물고 있는 젖꼭지를 빼고 자신이 조금 전까지 서성거리던 초원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새끼 당나귀도 같이 달렸다.

그들은 겨우 초원에 도착했다. 순간 또 하나의 화살이 날아와 새끼의 목에 박혔다. 화살은 피부를 뚫고 살에 꽂혀 부르르 떨었다. 새끼는 아픔을 못 이겨 비명을 지르다가 이윽고 무릎이 꺾이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앗사르하든은 이것을 그냥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새끼를 감싸듯이 하고 그 위에 버티고 섰다. 새끼가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그러나 가늘고 긴 다리로 몇 걸음 가다가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자 무서운 두 발 동물 - 인간 - 이 달려와 새끼의 목을 칼로 찔렀다. '그럴리가 없다. 이것은 단지 꿈에 지나지 않는다!' 앗사르하든은 있는 힘을 다해 눈을 뜨고자 노력을 했다. '분명히 나는 라일도 아니고 당나귀도 아닌 앗사르하든이다!' 왕은 큰 소리로 외쳤다. 이와 동시에 성수반에서 머리를 쳐들었다. 그러자 노인이 옆에 서서 마지막 물방울을 그의 머리에 떨어뜨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아,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모른다. 그리고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시간이었다!" 앗사르하든은 고통으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오랜 시간이었다고?" 노인이 반문했다. "너는 물 속에 머리를 담갔다가 금세 쳐들었을 뿐이야. 자, 이것을 봐라. 주전자에는 아직 물이 많이 남아있다. 그래, 이제는 알겠는냐?"

앗사르하든은 한마디 대답도 하지 못했다. 다만 공포에 떨면서 노인을 쳐다볼 뿐이었다. "이제는 깨달았을테지." 노인은 말을 이었다. "라일은 다름 아닌 바로 너야. 그리고 네가 죽인 병졸들도 너란 말이다. 병졸들만이 아니라 네가 죽여 술안주로 삼은 짐승들 역시 너인 것이다. 너는 자기 혼자만이 목숨을 가진 줄 알고 있었을테지만 나는 그 미망의 구름을 헤쳐 주었다.

뿐만 아니라 네가 다른 사람에게 나쁜 짓을 하면 그것이 곧 자기 자신에게 나쁜 짓을 한 것과 같다는 것을 너에게 일깨워 주었다." 노인은 천천히 의자에 앉으며 말을 계속했다. "생명이란 단 하나뿐이고 만물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네 생명은 만물에게 공통된 그 생명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네가 자신이 갖고 있는 생명을 개량하려 한다면, 네 생명과 다른 사람의 생명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장애물을 허물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남을 생각하고, 자신을 사랑하듯이 남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남의 생명을 끊는다는 것은 도저히 네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앗사르하든 왕은 언뜻 새끼 당나귀를 생각했다. "너는 자신의 생명만 소중히 생각했기 때문에 남의 생명을 빼앗아 자기의 행복을 증진시키려는 어리석은 짓을 한 것이다. 그런 짓을 하면 점점 더 생명이 줄어들 뿐이다. 그런 짓을 하면 점점 더 생명이 줄어들 뿐이다. 네가 죽인 사람들의 생명은 비록 네 눈에 보이지는 않겠지만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다. 너는 남의 생명을 줄이면 자신의 생명이 연장될 줄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당치도 않는 생각일 뿐이다."

왕은 자신이 죽인 병사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생명은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순간적인 생명이 있는가 하면 1천년의 생명도 있다. 네 생명도, 세계에 있는 모든 유형물의 생명도 결국은 모두 같은 것이다. 생명이란 멸할 수도 바꿀 수도 없는 것이다. 엄연히 존재하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은 단지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보일 뿐이다."

노인은 말을 마치자 홀연히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이튿날 아침, 앗사르하든 왕은 라일을 비롯한 모든 포로를 석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사형도 물론 취소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들인 앗사르바니팔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배운 것을 다시 생각하기 위해 사막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 그는 방랑의 길을 떠나, 생명은 하나밖에 없는 것이므로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결국 자신을 해치는 일이 된다고 열심히 설교했다.